리 사무총장은 노르웨이의 정치가 겸 노동운동가로 2차대전 기간 노르웨이 망명정부 외무상을 역임했다. 1946년부터 1952년까지는 유엔 초대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며 6·25를 겪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트뤼그베 할브단 리 초대 유엔 사무총장은 적극적으로 유엔의 한국전 개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는 소련의 신임을 잃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소련의 반대로 그의 재임(再任)은 무산됐다. |
그는 이 자리에서 “어제 자정 나는 한국에서 분쟁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중략) 유엔 한국위원회 및 한국의 다른 출처를 통해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북한군에 의해 군사적 행동이 취해진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행위는 유엔헌장에 대한 위배다.
현재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며 국제평화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나는 해당지역의 평화를 재건할 수 있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유엔 안보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유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남침에 맞서는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리 사무총장이 6·25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6·25와 관련된 유엔의 결의 및 개입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한 유엔 결의 82호에 이어 21개국이 유엔 깃발 아래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결의 83호 역시 그의 입김이 개입된 작품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고, 단순히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유엔군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엔으로서는 6·25가 하나의 시험대였다.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창설된 지 5년밖에 안 된 신생조직 유엔은 국제사회에서 존립기반을 다지기 어려울 수 있었다. 리 사무총장으로선 6·25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리 사무총장의 판단에는 유엔 한국위원회의 보고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6·25 발발 이전의 유엔 한국위원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 등의 사항을 유엔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남북이 대치한 38도선상에서의 분쟁은 1949년 3월 중순부터 격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유엔 한국위원회를 통해 리 사무총장에게 지속적으로 보고됐다. 6·25 당일에도 유엔 한국위원회는 “북한 공산군이 38도선을 넘어 무력 침략을 개시했다. 이러한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우리는 단지 한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인들의 평화를 사랑하는 열망을 위해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평화와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단계적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보고했다. 리 사무총장이 북한의 남한 침공을 유엔에 대한 도발로 규정하고 이 사태가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를 추구하는 유엔의 미래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간파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박병진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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