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희(46) 연희단거리패 대표를 최근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만났다. 이윤택 연출이 연희단의 대들보이자 지붕이라면, 김 대표는 이를 든든히 받치는 기둥 역할을 해왔다. 김 대표가 연희단과 인연을 맺은 건 1994년이다. 연희단이 배우 훈련소인 우리극연구소를 열었을 때 1기생으로 들어왔다. 대표직은 2008년부터 맡았다. ‘이윤택의 페르소나’ ‘연극계 대표 여배우’로 불리는 그이지만 처음에는 “연극을 계속할 의향 없이 왔고 이윤택 연출과 작업도 나와는 맞지 않다”고 느꼈다. 대학원 논문을 써야 하자 그는 연희단을 떠났다. 그와 이윤택을 다시 이은 건 러시아 연출가 박탄코프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얼떨결에 연극을 계속하게 된 건데 연극을 하면서 많은 걸 구제받는구나 느낀다”며 “제가 막가는 기질이 있는데 남과 함께 해야 하는 극단에 있다 보니 남들이 소통하기 좀 나은 사람이 됐다”고 밝혔다. 이제원 기자 |
극단 밥을 먹어온 지난 세월 그의 뇌리에 가장 선명히 찍힌 순간은 1996년 러시아 로스토프 공연이다. 유구한 연극 역사를 가진 러시아에서 당시 한국 극단은 별 기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햄릿’ 공연이 끝나자 연희단이 가는 곳마다 참가자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연희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해가 1999년이다. 물질적 욕구가 부풀어오르던 세기말, 배우들이 연극에만 몰두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마침 경남 밀양 시장이 폐교를 활용해볼 것을 제안해왔다. 이윤택 연출이 ‘이런 식으로는 본질적 작업이 힘들다, 내려가자’ 외쳤다. 서울과 부산에서 30명쯤이 짐을 꾸렸다. 배우들이 직접 폐교에 보일러를 깔고 콘크리트를 개어 벽을 쌓았다. 밀양연극촌에서 말 그대로 한솥밥 생활이 시작됐다. 함께 살며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종일 연극 훈련을 했다. 경북 김해 도요마을에도 연극을 집중해서 파고들 터전을 마련했다. 현재 밀양 식구는 60명쯤으로 불어났다. 2001년부터 시작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는 대표적 연극 축제로 자리 잡았다. 연극 하나만 바라보는 느슨한 경제공동체, 사생활을 포기한 생활 방식이 요즘 시대에도 가능한가 의아하다.
김 대표는 일본 도쿄대가 이들에게 이름 붙인 ‘이상주의 연극공동체’가 딱 연희단의 정체성이라 했다. 이들이 이토록 헌신하는 연극은 도대체 무얼까.
“연극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야 해요. 공연을 보러 오는 건 굉장히 적극적 행위예요. 그러니 그냥 보고 나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제공해야죠. 어떨 때는 불편하게 어떨 때는 강렬·궁금하게, 적극적으로 관객과 ‘밀당’하고 싶어요. 삶에서 인상적인 찰나, 서로 탁 통하는 강렬한 한순간을 느끼고 싶어요. 관객과 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연극 행위가 연희단거리패의 성격이 되면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죠.”
이들은 올해 30주년 기념으로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 이윤택 연출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이에 대해 “개판의 시대에 깽판으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연극계를 포함해 ‘개판’의 시대를 정면 비판하며 “올해 내내 이어지는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젊은 연극인들은 마구잡이로 거칠게, 우리는 세련되지만 기존 형식을 벗어난 작품을 올리는 것이 ‘깽판’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첫 무대는 ‘방바닥 긁는 남자’가 채운다. 28일까지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한다. 노숙인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기상천외하게 파헤친다. 김 대표는 “연희단과 닮은, 진짜 좋은 작품”이라며 “대단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나오니 꼭 보러 오라”고 당부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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