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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세인생’ 노래처럼 죽음, 당당히 맞서라

입력 : 2016-02-23 20:54:17 수정 : 2016-02-24 00: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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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안에 ‘백세인생’이라는 가요가 인기다. 노랫말 때문인지,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가장 많이 흘러나온다. 가사 중에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절만 봐도 인간의 수명은 물론 활동연령이 얼마나 길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교회의 원로 방지일(1911~2014) 목사는 102세가 되어서도 뉴욕 일원 한인교회에서 집회를 했다.

이 노래가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노랫말이 가진 함의가 삶의 위로와 함께 운명과 맞섬, 인생의 달관 등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조응태 선문대 신학과 교수
현대인은 지독한 삶의 무게로 인해 몸도, 마음도 고달프다. 20∼30대는 ‘완포세대(연애, 취직, 결혼, 집, 여행 등 일체 포기)’로 불릴 정도로 사기가 저하됐다. 그런데 난데없이 가요 하나가 나와 100세가 되도록 생을 영위하는 것도 모자라 죽음을 희롱하고 있으니, 부지불식간 카타르시스가 됐음직하다. 이 노래를 부른 늦깎이 스타가수와 흥겨운 우리가락이 버무려진 노랫말이 희망의 이모티콘을 만든 셈이다. 종교에서 이모티콘은 상대방을 축복해 줌으로써 나도 복을 받는 상호축복 효과를 낳는다.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나 영웅, 혹은 출세한 이가 쓰는 물건이나 상징물을 휴대하면 액운이 물러나고 좋은 일이 밀려와 삶의 활기를 되찾게 한다는 설정이다.

노래에서 자주 반복되는 ‘전해라~’ 화법은 저승사자의 명령에도 기죽기는커녕 대등한 자세를 견지하는 해탈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갑질이 판을 치는 작금의 현실을 비웃듯이 저승사자와 익살스럽게 타협을 시도하고 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법하다. 이 노래에서 하늘과 땅, 저승과 이승은 온전히 대등하게 만난다. 그것도 민요 ‘아리랑’ 음조를 띠고 자연스럽게 조화된다.

노랫말에서 주인공 보통사람은 생사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는 자로서의 용기를 드러낸다. 삶은 물론 죽음마저도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신선의 경지를 펼쳐 보인 것이다. 그렇다고 저승사자 앞에 교만함을 떠는 것도 아니다. 당당한 자신의 권리를 내보일 따름이다. 이것은 진리를 찾아 오랜 세월 내공을 쌓은 수도자만이 뱉을 수 있는 고백이요 아름다운 언어의 만다라다. 깊은 영성의 솟구침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종교가 다뤄 온 가장 무거운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비법은 없는지, 사후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 등에 대한 물음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답을 주고자 노력해 온 것이 종교다. 그런데 이 노랫말에는 죽음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자가 누리는 달관의 여유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웃음으로 돌려놓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면 죽음은 어두운 터널이 아니라 유머로 풀어낼 수 있는 선물이 된다. 노래의 결말에 이르러 ‘백오십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이라며 150세까지 살 것이라는 호기를 부린다. 이 또한 호탕한 반전이다.

신의 실존과 생명, 죽음 등 소재는 종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류사회가 서로 비우고, 돕고, 깨치면서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지혜의 보석이 돼야 한다.

조응태 선문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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