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후 8시쯤 서울 대학로 동숭무대소극장 지하 1층 공연장. 무대 위 한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읽기 시작했다. 무대 경험이 전혀 없던 시민 이두찬(32)씨였다. 이씨의 시 낭송은 유려하지도 않고 간간이 거친 숨소리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관객 몰입도를 끌어 올렸다.
이날 닷새간의 공연을 마무리한 일본군 위안부 소재 연극 ‘더 소녀(THE 소녀)’는 배우가 아닌 일반인 관객이 무대에 올라 동명의 창작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김사빈 감독은 “우리 모두가 결국 위안부 할머니라는 문제의식을 눈으로 보여주고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싶어 이런 연출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무사히 시 낭독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 온 이씨는 “리허설 때 실수를 많이 했는데 본 공연에서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한숨을 돌렸다.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무대로 그를 이끈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이씨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아픔에 국민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며 “공연 취지에 동감해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연극 ‘더 소녀’ 출연진이 지난 28일 서울 대학로 동숭무대소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김범중, 이정훈, 구재숙씨, 박재동 화백, 창작시 낭송 시민 이두찬, 뮤지션 이씬씨. 서상배 선임기자 |
스크린과 스탠딩 마이크가 하나씩 설치된 조촐한 무대에 공연자도 무명의 남녀 배우와 일반인 낭독자 등 6명이 전부다.
소녀상이라는 가상의 존재가 바라보는 비극적인 현대사가 영상으로 흐르고 연기와 낭독, 퍼포먼스가 어우러지는 방식이다.
극중에서 순아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 구재숙씨는 “딸을 위안부로 보낸 어미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지만 실제 역사 속 어머니의 10분의 1이나 담았을지 모르겠다”며 “아이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어미 된 마음으로 지금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한 배우 김범중씨는 “악마적인 캐릭터라서 세밀한 감정을 처리하기가 힘들었다”며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적인 협의와 서로 간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출연 소감을 밝혔다.
이날 자녀들을 데리고 공연을 관람한 박기운(50)씨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를 아들딸에게 각인시켜 주고픈 마음에서 공연장을 찾았다”며 “조금 어려운 내용이긴 했지만 어머니가 딸을 찾는 그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달된 것 같다”고 털어놨다.
무대를 내려 온 ‘더 소녀’는 제97주년 3·1절을 맞아 1일 거리에서 새로운 관객들과 만난다.
오후 2시30분부터 3시간여 동안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뒤 평화의 소녀상 부근에서 공연 뒷이야기를 전하고 시를 낭송하는 행사가 열린다.
김 감독은 “3·1절을 맞아 소녀상을 찾는 시민의 참여를 끌어들여 특별한 시간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 모두가 함께 하자고 선언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환·조성민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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