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백조의 호수’를 처음 했을 때 흑조가 내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일일이 만들어야 해 힘들었어요. 자세 하나, 눈길 둘 곳까지 신경 썼죠. 배역이 익숙해져 내 것이 되니, 내 안에 잠자던 흑조가 나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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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인 황혜민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는 “뭘 더 춰보겠다는 욕심보다 남은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며 “드라마 같은 새로운 발레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
“꾸준히 작은 파도를 이겨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렇게 내면에 강함이 쌓인 듯해요.”
흑조는 그의 부드러운 외피에 싸인 강한 내면을 끌어내야 하는 역이다. 외유내강인 성격은 ‘힘들어도 힘든 티를 안 낸다’는 주위 말로도 짐작된다. 감기쯤으로는 연습에 빠진 적이 없다. 그는 “저 진짜 성실하다”며 “약간 아프거나 침대에서 ‘가지 말까’ 싶은 날에도 연습실에 오면 괜찮다. 제가 안 오면 정말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성실함으로 그는 수백번 ‘백조…’를 연습하고 수십번 무대에 올랐다. 그렇다고 마음 놓을 만큼 만만하지는 않다.
“여러 번 했다고 쉽지 않아요. 지난번과 달리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끝이 없어요. 백조가 사람이 아니잖아요. 코가 부리라 선을 신경 쓰고, 팔은 날개라 더 길게 빼요. 어깨 진짜 아파요. 팔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는 “마지막 2막 2장에 가면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이제 나이가 들어 노련미와 완숙함이 있다”며 “나만의 방식을 만들 수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어릴 때는 힘과 기술로 하려고 아등바등 집중했어요. 음악대로 딱딱 맞췄어요. 지금은 좀 더 드라마로 풀려고 해요. 같은 스텝이어도 느리게 했다 빠르게 했다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요. 1막 2장 아다지오가 8분이에요. 백조와 왕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죠. 여기서 왼다리에 쥐가 날 만큼 힘들어요. 제일 처음 ‘백조’를 할 때는 다리 높이 들고 3박자에 하나씩 정교하게 추려 하거든요. 이제는 완급을 줘서 8분간 곡선을 만들어요. 이 장면도 다 드라마니까요.”
해석에 공들이기 때문일까. 그의 연기력은 인상적이다. 멀리서 봐도 몸짓으로 기쁨, 좌절, 슬픔이 전해진다. 어린 시절 그는 내성적이라 웃지 않았다. 무표정하다고 지적 받았다. 미국에서도 ‘아무 감정 없이 하는 애 같다’고 했다. 발레단에 와서 달라졌다.
“문훈숙 단장님이 팁을 많이 주셨어요. 처음에 ‘지젤’ 가르쳐 주면서, 본인도 남자를 보기가 창피했다고 눈 마주치기 부끄러우면 남자 눈동자 색을 보래요. 단장님이 ‘울기 전 어디가 제일 먼저 떨리는지 아니’라고 물었어요. 눈물이 글썽글썽하면 아랫턱이 먼저 떨린대요. 그래서 저도 드라마 볼 때 어떻게 우나 집중해요. 그런데 만들어서 하면 연기가 아닌 것 같아요. 속에서 나와야 해요.”
그는 책이나 드라마를 볼 때 인물에 동화돼 상상에 빠진다. 드라마를 시청하다 ‘난 송중기랑 결혼했어야 했어’하고 남편 옆에서 장난치기도 한다. 그는 UBC 수석무용수 엄재용과 2012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10년 넘게 파트너로 춤췄다. 이번에는 엄재용 외에 이동탁과도 호흡을 맞춘다.
“느낌이 완전 달라요. 새로운 에너지가 있어요. 엄재용씨와는 10년 넘게 호흡을 맞춰온 노련미가 있을 거고요. 이동탁씨와는 좀 더 새로운 긴장감을 관객이 느낄 거예요. 동탁씨는 외모는 세 보이는데 전혀 안 그래요. 남자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 여린 게 있어요.”
요즘 그의 고민은 2세 문제다. 출산 후 지금 같은 기량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남은 동안 최고의 시간을 보내려 해요. 추고 싶은 걸 다 추고 아이를 가져야지, 안 그럼 후회할 것 같아요. 무대에서 내려올 때 ‘미련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미련이 없을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발레 그만해야지’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못 놓는 것 같아요. 춤출 때 정말 좋아요. 발레단이 가족 같아요. 물론 발레는 자신과의 싸움이라 스트레스가 있죠. 바쁘고 몸에 무리도 많이 가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자기 전에 스트레칭을 안 하면 다음날 힘들기까지 해요. 힘들고 지치는 순간도 있지만 즐기는 거죠.”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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