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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허언 속 ‘웃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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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23 21:07:57 수정 : 2017-02-03 17: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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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서 물 만난 ‘허갤러’들
통 커진 허세는 불행의 씨앗
좀더 소박하고 한갓지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꿈 키워야
한 문예지에서는 우리 시대 문학적 상상력의 코드를 ‘괴물, 웃픔, 홀(alone), 탈(脫)’로 꼽았다. 이 네 개의 키워드를 보면서 나는 ‘허언증’을 떠올렸다. 올해 초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허갤러’(허언증 갤러리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원래 허언증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고 왜곡해서 말하는 망상적 증상을 일컫는다. 그러나 SNS에서 유행하는 허언증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뻥과 구라라는 점에서 유머나 허무개그에 가깝다.

소위 ‘거짓말들의 개드립 향연’이라는 허언증의 글들은 어처구니없이 허풍스럽기에 탈현실적이고, 시점이든 주체든 대사이든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기에 괴물스럽고, 어쨌거나 혼자서 잘 놀고 있는 흔적이기에 히키코모리(방 안에서 혼자 틀어박혀 있는 사람)적이고, 비루한 진짜 현실을 겨냥한 우스꽝스런 가짜기에 ‘웃픈’ 결과물들이다.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시인
이를테면 이렇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합니다만”이라는 제목 아래 노벨수학상(노벨상 중 없는 분야다!) 메달 사진을 인증 첨부하고는 “9급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 있나 궁금하네요”라고 덧붙이는 식이다. “먹고살기 힘드네요, 오늘도 라면이네”라는 제목 아래에는 커다란 오만원권 뭉치로 컵라면 뚜껑을 덮어놓은 사진과 “다들 힘내죠”라는 드립이 함께한다. “∼에 다녀왔습니다”라면서 그곳 상징물을 닮은 조악한 가짜 사진과 천연덕스런 여행 소감을 덧붙이고, “∼ 자랑 좀 하려구요” 하면서 대상 사진을 올리는데 그 사진에 대세 연예인 사진을 흐릿하게 합성시켜 놓는다. 실수처럼 찍힌 연예인이 자기인 듯.

이런 허언들에는, 우리의 눈과 귀는 날로 ‘통이 커져’만 가는 우리 사회의 허세와 허풍과 허영이 담겨 있다. TV를 켜면, 남자 주인공은 송중기에 박보검이고 여자 주인공이라면 윤아에 설현이다. 없는 것 없이 넓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천사처럼 사랑스럽다. 10억대, 100억대의 집과 인테리어, 자동차와 빌딩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이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못생기고 가난한 애인과 연애하느니 차라리 혼자 살고, 생활비 충당에도 버거운 연봉을 벌기 위해 출퇴근하며 과도한 업무에 스트레스 받느니 그냥 가까운 데서 알바나 한다. 분가해 개고생하느니 캥거루 새끼로 살고, 아이를 최고로 키울 수 없으니 ‘무상파’(무자식상팔자주의)가 된다. 돈도 없고 재료도 없고 시간마저 없으니 라면이나 끓여 먹는다. 부채 상승률, 실업률, 자살률, 이혼율, 저출산율, 낙태율, 노인화 지수 및 빈곤율, 저임금 노동자 비율 등 세계 1위를 찍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지표들이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무한경쟁 현실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기에, 터치하고 클릭하며 잠깐이라도 이 현실을 휘리릭 넘어서고 싶은 것이다. 눈앞에 닥친 ‘먹고사니즘’에 치이고 세상만사가 ‘귀차니즘’으로 권태롭기에, ‘헐!’이든 ‘헬!’이든 ‘할!’이든 ‘뻥치니즘’으로 건너뛰려는 것이다. ‘조소니즘’과 ‘허세니즘’은 부록 같은 덤이다. 실은, 터치하고 클릭할수록 현실은 우울하고 현실에 절망한다.

허언증을 앓는 사람의 거짓말이란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순진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한 시대의 징후로서의 허언증은 그다지 순진하지만은 않다. 그 허언들 속에는 일확천금의 욕망이, 끝 모를 결핍이, 하여 우울증에 몰아넣는 허무와 무기력이, 공격 직전의 냉소와 분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진짜로 믿고 싶어질 때, 그 ‘웃픈’ 거짓말이 현실 부정을 넘어서 혐오를 불러일으킬 때, 한 시대의 집단 허언증은 시대적 폭력으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날로 ‘통이 커지는’ 눈과 귀가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좀더 한갓지고 좀더 소박하게, 침묵과 부재와 내면과 깊이에로 열리는 시간들을 꿈꿔본다. 현실에 찰싹 붙어서 성찰하고 반성하고 비전을 세우는 견실함을 꿈꿔본다. 우리 곁에는 가을이 와 있다.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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