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좌제는 범죄인의 친족도 연대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다. 공동체 지배원리가 통용되던 고대사회에서 비롯됐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살인자나 반역자의 가족을 노비로 만들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됐다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활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당 치하에 있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처벌한 뒤 이들의 친족까지 공무원 임용, 해외여행, 사회활동 등에 제한을 가했다. 집과 직장으로 뻗치는 감시의 눈길 탓에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연좌제라는 괴물은 내일을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 그것을 피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성동은 소설 ‘엄마와 개구리’에서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 뱉는 빨갱이가 되어 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풀기 빠진 헛바지처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라고 했다. 연좌제는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서 공식 폐지됐지만 한동안 암암리에 적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 아물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다. 답변서에 언급할 말이 아니었다.
답변서는 또 “정치인들은 연설문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너무 딱딱하게 들리는지,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는지 주변에 자문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며 이를 키친 캐비닛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행정부 밖의 지인들을 식사에 초대해 자문을 구한 데서 비롯됐다.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하며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취지에서 최씨 의견을 들었다는 것인데 실소를 자아낸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더라도 이런 궤변투성이 답변서를 낸 이유를 알 도리가 없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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