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인사이트] 임종석 靑 비서실장·경문협 ‘남북대화 키맨’ 역할 하나

통일부 장관 인선 안 된 상태서 대북채널 주목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렇듯 중요한 대북 관계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통일부 장관 회고록 ‘피스 메이커’).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넉 달 전인 2월 당시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북한이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의사를 타진해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통령 면담 이후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만난 임 전 원장은 이 회장에게서 박 장관이 현대에 정상회담 주선을 요청했고, 이 회장은 박 장관 요청에 따라 요시다 다케시(吉田猛)라는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계 재일동포를 통해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본격 추진하게 된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남북관계에서 공식 채널보다 비선(秘線)이 결정적 역할을 한 대표적 사례다.

남북교류 물꼬 트나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대북 민간단체 활동이 기지개를 켜는 가운데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그가 2005년부터 이끌어온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사진은 문재인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대북 접촉 승인을 받은 대북 인도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대북 지원 물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박근혜정부는 남북대화와 대북 정책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물밑 접촉이나 비공개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 남북관계 개선을 외교안보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문재인정부는 비공개 물밑·막후 대북 접촉에 적극적이어서 그간 숨죽여온 여러 갈래의 대북 채널이 가동될 것으로 예상된다. 새 정부에서 남북대화 및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키맨은 누가 될지에 관심이 쏠리는 배경이다.

대북 정책 및 공식 남북대화 창구 역할을 하게 될 통일부 장관이 인선되지 않은 상태인 현재 정부 안팎에서 예의주시하는 인물과 기관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그가 2005년부터 이끌어온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다. 임 실장은 남북 경제협력 교류 사업에 각별한 관심이 있어 서훈 국정원장 후보자 이외에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며 대북·통일 정책과 관련해 조언하거나 보이지 않는 중요한 역할을 할 개연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임 실장은 지난 21일 홍석현·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임명 시 “특보라는 게 실행 조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문이다.(대통령에게 상시적으로 조언하고 대통령 의사를 집행하는) 외교안보수석과는 다르다”고 특보의 역할을 정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임 실장의 이력을 보면 남북관계와 대북 정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그는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 대표(전 의원)를 파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임 실장은 2008년 펴낸 ‘현장기록 통일정책론: 장산곶매 평화로 날다’라는 저서에서 “남북관계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꿈을 잠재울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남북관계를 위해 헌신했던 옛 동료와 함께 실천적인 남북교류를 위한 단체를 하나 만들었다”며 “그것이 바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라고 썼다. 경문협의 대표적 사업은 남북 저작권 교류 사업과 김일성종합대학 전자도서관 사업이다. 경문협은 국내에서 북한과의 저작권 계약을 독점적으로 맡고 있다. 지상파와 종편(종합편성채널) 등 국내 방송사는 경문협을 통해 북한의 조선중앙TV와 계약을 맺고 방송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있다.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되다시피 한 박근혜정부 시절에도 경문협은 간헐적으로 중국과 개성에서 북한과의 접촉을 이어갔다. 정부의 승인을 받아 2014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같은 해 8월 개성, 2015년 4월 개성, 2015년 3월 중국 선양, 같은 해 11·12월 개성에서 북측과 접촉했다. 2014년 12월 북한 유소년축구단 환영만찬에도 참석하는 등 경문협은 민간 남북교류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 모두 임 실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시기 이뤄진 일이다. 임 실장은 2005년 8월부터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호 인사인 비서실장 발표로 사임하기까지 경문협 이사장을 맡았다. 이재상 경문협 사무처장은 “임 실장은 비서실장에 임명된 5월10일 사임서를 제출했다”며 “서류상으로는 아직 이사장이지만 30일 이사회를 개최해 신임 이사장을 선임할 계획이고, 새 이사장 등기를 마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현재 청와대에는 임 실장과 경문협을 고리로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 하나 둘 합류하는 모양새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담당했던 신동호 연설비서관도 경문협 출신 인사다. 임 실장과 같은 한양대(국문과) 출신으로 전대협 문화국장을 지낸 신 비서관은 경문협 사무총장과 상임이사를 맡았다. 외교부 장관에 이어 통일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되는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인천시장이던 시절에는 인천시 남북관계 특별보좌관을 했다. 경문협 임원 시절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측과 접촉해 실무를 협의한 경험이 있고, 2013년에는 경문협의 지원을 받아 ‘분단아 고맙다’라는 산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러시아 특사를 한 송 의원과 함께 통일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는 우상호, 홍익표 의원도 경문협 임원을 지냈다. 송, 우 의원은 부이사장, 홍 의원은 이사를 지냈다. 이 사무처장은 “국회의원의 겸임 금지 제한 규정이 제정된 이후 정치인 임원은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설명했다.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경문협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이지만 해당 단체는 조심스러운 태도다. 이 사무처장은 “지난 9년간 경문협 활동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고 새 정부 출범 이후 오히려 정부 지원을 받거나 대북 접촉 활동을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민서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