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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하늘·땅·바람에서 끄집어낸 추상

입력 : 2018-05-29 21:19:55 수정 : 2018-05-30 11: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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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풍경·역사를 그리는 강요배 작가 / 자연풍경을 본 다음 시간이 흐른뒤 / 중요하고 강한것, 느낌·흐름·기운… / 압축된 강력한 기억 캔버스에 담아 / 나무껍질 같은 거칠함이 제주 질감 / 얌전한 붓대신 칡뿌리·빗자루 사용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기면 그것들이 되살아난다. 멀리…, 또는 가까이……. 파도 - 소리 - 바람 - 스침 - 차가움 - 힘참 - 거칠음 - 하염없음 - 시원함 - 부서짐 - 휘말림 - 하얗게 - 검게 - 첩첩이 - ……. 이 전체 속에 흐르는 기운. 형이나 색보다 더 중요한 바로 그것!”

제주작가 강요배의 그림에선 제주의 바람과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제주의 바람과 빛을 담은 작품 '풍광' 앞에 선 강요배 작가. 그는 “감각이 내면에 켜켜이 쌓여 형성된 심상(心象)을 끄집어 내는 것이 나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이런 체험들은 나의 심성을 이룬다. 어쩌면 그것이 ‘나’ 일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또한 내가 바라본 것이 이 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더도 덜도 아닌, 그것들은 단적으로 표현되기를 기다린다. 그림이다. 그림으로써 내가 확인된다. 그리고 한 개인적 체험이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가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다.

“사진 이미지들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그림다운 차별성이 나의 화두다. 표피 이미지가 아닌 압축되고 일상의 사건조차도 잡아내는 것이다. 별자리 천상, 주역의 괘상 같은 상(象)을 그려야 한다.”

 자연관찰을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외부 대상에 빠지지 않는다.

“중요하고 강한 것, 다시 말해 느낌, 흐름, 기운을 작업실로 돌아와 시간이 지나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세부적인 것은 사라지고 강력한 기억만 남게 된다.”

그의 그림은 경험한 것 중에서 기억의 요체(마음속에 남은 것)만 추출해 낸 산물이란 얘기다. 자연스레 인상적이고 추상적이다. 인상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킨다. 봄이 오는 시기에 그린 작품 ‘춘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홍매가 필 무렵 빨간 기운을 그렸다. 구질구질한 표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명암마저도 사라졌다.

강 화백은 나무껍질 같은 제주의 거칠한 땅이 ‘제주의 질감’이라 했다. 이를 담아내기 위해 그는 터치가 너무 얌전한 기성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종이를 구겨서 붓을 삼거나 말린 칡뿌리나 빗자루로 그린다.

“한민족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특이하다. 나무와 흙을 다룬 가구와 상감청자, 분청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재질감이다. 상(象) 이전에 질감을 중시했던 이유를 고향 제주에 내려와서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인의 미감일 것이다.

“나는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처음에 분위기를 파악한다. 다음에는 유난히 눈에 띈 것을 관찰한다. 그러고는 관찰체험을 심적으로 여과하면서 그것을 의미 있는 무엇으로 지니고자 한다. 분위기는 물체나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적인 큰 느낌이다. 그것은 시야나 온몸에 단번에 다가오는 즉각적인 감각이지만, 경험이나 사전지식 그리고 막연한 예상에 뿌리 내린 감각이기도 하다. 즉 이해와 감성의 복합작용이다.”

세계적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비평서 ‘감각의 논리’를 떠올리게 해 주는 말이다. 구조, 형상, 윤곽만으로 이루어진 자칫 단순해 보일 수 있는 베이컨의 그림들에서 들뢰즈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읽어 냈다. 이 힘은 리듬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들뢰즈는 유기체가 아닌 신체 자체에 의해 느껴지는 원초적 감각 속에서 리듬을 발견해 내고 리듬과 감각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힘 즉 에너지를 느꼈다. 베이컨 그림에서 보이는 긴장감은 시각을 격렬하게 충격하고, 마침내 눈으로 만지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공간은 이제까지의 회화에서 보여 왔던 명암의 대비에 의한 공간이 아니라 수축과 흩어짐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윤곽과 빛에 의존해 온 이전의 회화를 뛰어넘어 색을 중시하는 독창적인 회화를 창출했다. 강요배 작품에서도 색의 율동이 읽힌다.

너무 많이 죽어 아름다움마저도 죄스러운 제주의 아픈 역사를 형상화한 작품 ‘동백꽃 지다’. 동백꽃 툭 떨어지거들랑 그날을 기억해 달라는 듯한 작품이다.
“감각과 사유는 하나다. 이성적 사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 우위의 시대는 끝났다.”

그는 생명존중, 인간존중의 시대는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감각의 시대에 가능한 일이라 했다. 제주 4·3항쟁을 보는 시각도 같은 맥락이다. 제주 풍경뿐 아니라 역사화, 소위 민중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정신이다.

“4·3항쟁을 몸소 겪은 아버지는 나의 이름을 특별하게 지으셨다. 육지에서 출동한 토벌대는 빨갱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들을 색출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혹시 그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함께 처형됐다. 순이, 철이와 같이 흔한 이름을 가진 이들이 억울하게 많이 희생됐다. 자식 이름을 절대 남들이 지을 수 없는 요배로 지었다.”

그는 제주라는 땅이 품고 있는 역사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태어난 것이다. 그가 제주 땅과 역사를 그리는 이유다. 그의 작품전이 학고재에서 1부(6월17일까지), 2부(6월22일∼7월15)로 나눠 열린다.

편완식 객원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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