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세계일보가 대학 부설 한국어학당 실태를 분석한 결과, 대다수의 한국어 강사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강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 대부분은 대학과의 계약 체결 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고, 오는 8월 시행되는 일명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도 불투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한국어강사 자격 부여 조건을 설명한 국어기본법 시행령(제13조)에서는 이들을 ‘한국어교원’으로 명시해 교원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고등교육법(17조) 등에 따르면 시간강사는 ‘재학생을 대상으로 대학 학칙에 운영되는 정규교육 과정의 특정 과목을 강의하는 자’로 규정한다. 이로 인해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교육하는 한국어강사의 경우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고용부 해석대로 한국어강사를 기간제 근로자로 볼 경우 한 대학과 2년 이상 연속으로 계약한 한국어강사는 자동으로 무기계약직으로 간주한다. 문제는 대학이 무기계약직에 준하는 임금·혜택을 부여하지 않아도 그에 따른 제재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허점이 대학에서 ‘입맛대로’ 한국어강사를 채용할 수 있는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간제법상 벌칙이나 행정규제가 없어 손해배상,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등 한국어강사 개인이 민사 소송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에서는 근로자로서 한국어강사의 기본적인 권리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경희대 국제교육원에서는 수년간 근로계약서 작성 없이 한국어강사들을 채용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경희대 국제교육원에 출강 중인 강사 A씨는 세계일보에 “전체 강사는 100여명이 넘는데 이중 최소 80명 이상이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경희대 학부 교수들과 사제지간 출신인 강사들이 많아 얼렁뚱땅 구두계약을 맺고 있다”며 “수업시수를 받는 데 불이익이 생길까 반발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알려왔다. 근로기준법 17조(근로조건의명시), 114조(벌칙)에 따라 근로계약서 미작성 시 건당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경희대 국제교육원 측은 “과거에는 계약서를 썼는데 자동갱신이 되고 있다”고 일부 시인했다. 이어 “현실을 반영해 (계약서) 문구를 수정하는 과정 중에 있으며 강사들의 요구사항을 취합 중”이라고 덧붙였다.
숭실대 국제교육원의 계약직 강사들은 향후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세계일보가 입수한 지난해 계약서에 따르면 국제교육원 측은 “본 계약은 당사자 간 자유의사에 따라 체결하였으며, ‘을’은 계약기간만료 후 계약의 종료 내지 본 계약에서 정한 사항을 부정하는 이유로 민형사상 이의제기를 일절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의 ‘부제소특약’ 조항을 달았다. 숭실대 측은 부제소특약과 관련해 “노무사에게 자문했고, 특별한 뜻 없이 들어간 조항”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진아 이산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매매계약 자체가 현저하게 불공정한 법률행위로 무효인 경우, 그 계약서에 기재된 부제소특약 역시 무효로 본 대법원 판례(2009다 50308)가 있다”며 “계약서 작성 시 사실상 위계의 고하가 확연하게 나뉜 상황에서 이런 내용에 대한 사전합의는 유효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소속 계약직 강사들은 지난 16일부터 처우 개선과 고용 안정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다른 어학당에서도 동참할 조짐이다.
한국어강사는 국어기본법 제19조(국어의 보급) 등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교원 자격을 부여받는다. 이에 서울대 언어교육원 강사들은 지난해 초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등에 장관과의 대화, 국민제안 등을 통해 한국어강사 처우에 실태 조사와 법적 지위에 대한 해석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문체부는 “우리 부처에서 시정을 요구할 법적 근거와 권한이 없다”고 답했고, 교육부는 1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묵묵부답이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러시아 출신 귀화인’으로 유명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는 최근 페이스북에 고용불안에 휩싸인 한국어강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를 올리며 응원했다.
그는 “내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신 은사 최영 선생님, (당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부설 한국어교육원 소속) 최 선생님의 동료들도 전원 비정규직이었다. 1991년 그때도”라며 “제 학생들도 여러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운다. 그들의 은사가 계약 기간 6개월, 월급 100만∼160만원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착취와 부당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학생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들은 위촉강사, 책임강사, 도급강사 등 대학별로 만든 ‘자체 직책’에 따라 짧게는 10주, 길게는 1년마다 계약서를 썼다. 어학원 원장, 행정실장 등이 바뀔 때마다 계약기간이 널뛰었다.
A대 어학당 강사 B씨는 “그동안 1년 단위로 계약서를 써왔는데 최근 학교 측이 ‘앞으로는 10주 단위로 계약을 하겠다’고 통보해왔다”며 “이유를 물었더니 ‘윗사람이 바뀌어서’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어강사들은 법적 지위가 모호해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복지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어학당에서는 병가 개념이 없어 수업을 빠지게 될 경우 직접 대리강사를 구한 뒤 자신의 강의료를 고스란히 넘겨줘야 한다. 육아휴직, 출산휴가 등 장기간 휴가를 쓰려면 계약을 중단해야 한다. 이마저도 휴가 이후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해 강사들은 발만 동동구르고 있다.
한국어강사들은 고용불안과 함께 처우 개선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이지만 시간당 강의료는 평균 3만원 선이다. 시위에 나선 서울대 언어교육원의 경우 강사 80명 전원이 석·박사학위 소지자이며 시간당 임금은 4만1000원으로 전국 어학당 중 가장 높다. 하지만 이는 학부 시간강사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큰 문제는 수업시수다. 이들에게 주어지 주당 평균 시수는 12시간 수준에 불과하다. 한 달 평균 급여는 12시간을 기준으로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은 160만원 정도다. 이화여대 언어교육원 C 강사는 “이마저도 학기마다 배정시수가 일정치 않다”고 털어놨다.
강의 준비, 시험지 채점, 학생 관리 등에 소요되는 시간을 근무로 인정해주는 대학은 거의 없다. 또 주말 등에 열리는 어학당 행사에 참가해 ‘무료 봉사’를 하는 대학도 상당하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의 D강사는 “연세대는 내규에 따라 60세 정년을 보장해주는 편이라서 타 학교보다 처우가 나은 편”이라면서도 “시간당 강의료가 2만원대로 전국 어학당 중 최저 수준인데, 시간 외 근로까지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한국어강사의 고용불안과 열악한 처우는 한국어 교육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제한국어교육학회에서 한국어교사 처우 만족도를 조사한 이수미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전임교수는 “각 언어교육원에서 추천된, 또 무작위로 뽑힌 한국어강사 몇몇을 인터뷰한 결과 한국어강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대다수가 9∼10점을 택했지만 수업 외 근로환경에 대한 만족도는 1∼3점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언어교육원 한국어강사 김모씨는 “저를 비롯한 모든 강사가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단지 대학뿐 아니라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한국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긍지를 가지고 일한다”면서 “그런데도 한국어강사라는 이유만으로 왜 이렇게 당당히 말도 못하는 상황까지 왔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동수 기자 samenumb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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