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이 양국 간 전면적 ‘경제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관세와 기술에 이어 23일(현지시간) ‘환율카드’를 새롭게 빼 들면서 전선이 무한 확대되고 있다. 환율 문제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 그리고 한국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장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안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 내에서는 다음달 28,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시터후이’(習特會·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회담) 가능성에 대해 회의론이 불거지고 있다.
◆美, 中 겨냥 환율전쟁 포문
미국 정부가 무역이익을 위해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를 판정해 이에 상응하는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보는 국가들에 대해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이 향후 무역상황에 따라 대미 무역 흑자국에 ‘관세 폭탄’을 안길 가능성이 커지면서 세계무역에 또 하나의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번 미 정부 발표는 우선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환율 문제는 미국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의 하나로 지목했었고, 미·중 무역협상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중국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해 자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여 왔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은 아울러 중국을 겨냥해 핵심부품 공급을 차단하는 제재 범위를 대폭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미 정부는 상무부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외국 기업들의 이름을 올리는 블랙리스트(Entity List)를 개정해 몇 주 내에 구체화하기로 했다. 새롭게 개정되는 블랙리스트에는 인공지능(AI), 로봇공학, 3D 프린팅 등 미래 최첨단 기술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미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華爲)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드론 제조업체인 다장(DJI), ‘하이크비전’ 등 5개 영상장비 감시업체를 정조준했다.
◆‘대장정’ 상기하며 단합 강조한 習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4일 싱크탱크인 중국 국제경제교류중심의 장옌성(張燕生) 수석연구원의 견해를 인용해 “현재 상황이 맞지 않아 미·중 정상회담 성사가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장 연구원은 전날 중국 정부가 주관한 브리핑에 참석해서도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G20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만나 실제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라며 회의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우리 동양인들은 체면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미국은 철저히 이를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장 연구원은 무역협상에 직접 관여하는 인사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기관 연구원의 이 같은 분석은 중국이 미·중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SCMP는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G20 정상회의 당시 중국이 양국 정상 간 회동 추진에 적극적이었던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이다.
루캉(陸慷) 외교부 대변인은 24일 브리핑에서 “중국은 우호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경제무역 분야를 포함한 이견을 해결하기를 원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면서도 “다만, 대화와 협상은 상호 존중과 평등의 기초 위에서 이뤄져야만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 관영매체가 연일 대미 비판에 나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관영 신화통신,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 중국 중앙방송(CCTV) 등 중국 3대 매체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워싱턴 무역협상이 결렬된 뒤 줄곧 미국에 날을 세워 왔다. 이날 인민일보는 1면에 또다시 칼럼을 게재하고 “우리는 오늘 새로운 대장정 위에 서 있다”며 “국내외 각종 중대한 위험과 도전에 맞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 주석도 이날 95세 퇴역군인 장푸칭의 업적을 강조하며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단합해 새 시대의 강대한 역량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무역전쟁을 맞아 국공내전 당시 대장정 때처럼 다시 단결하자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양국 정상 간 회동과 무역협상 극적 타결에 대한 기대감이 여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역전쟁 장기화로 양측 모두 출혈이 커지고 있어서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미 농가 지원계획을 발표하며 “화웨이 문제를 무역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무역협상 타결을 고리로 화웨이 문제를 풀어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루캉 대변인은 이에 대해 “미국 측이 어떤 의미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서도 “미국은 국가 역량을 동원해 다른 국가의 기업을 압박하는 행위를 중단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이우승 특파원 ws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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