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군(行軍). ‘군대가 대열을 지어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만큼 육군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육군의 10대 군가 중에 ‘행군의 아침’이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행군은 육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육군 장병이나 예비역들에게 행군은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40㎏에 달하는 완전군장을 짊어진 채 목표 지점까지 걷고 또 걷는 행군과정에서 머릿속은 멍해지고 다리에서는 통증이 느껴지며,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힌다.
이렇게 육군 장병들을 괴롭히던 행군이 지상작전에서 사라질 조짐일 보이고 있다. 육군이 추진중인 워리어플랫폼과 백두산 호랑이(아미 타이거 4.0) 체계 때문이다. 육군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적용된 차량과 최신 전투장비로 무장한 첨단 기술군대로 기존 보병부대를 바꿀 예정이다. 육군의 이같은 움직임은 최단시간 내 적 전쟁지도부를 무너뜨리는 입체기동작전과 맞물려 한반도에서의 지상작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신속하고 스마트하게 움직인다”
워리어 플랫폼은 장병의 신체와 미래기술을 결합해 전투원의 생존성과 전투능력을 높이는 개인전투체계다. 이를 위해 육군은 병사 개개인을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육군은 전투복, 방탄복, 방탄헬멧, 조준경, 탄창, 개인화기 등 33종의 신형 피복과 장비를 워리어플랫폼에 포함했다. 전력화 추진중인 1단계에서는 성능이 향상된 방탄헬멧과 방탄복, 전투용 장갑, 보호대, 전투용 안경, 대용량(3L) 식수보관 가방인 카멜백, 응급처치키트, 표적지시기, 조준경, 확대경 등이 병사 한 명에게 지급된다. 육군은 2023년까지 피복과 장구류 및 장비를 새로이 갖추는 1단계 작업을 진행한 뒤 2025년까지 통합형 개인무기체계를 만드는 2단계를 거쳐 2026년까지 일체형 개인무기체계를 완성한다는 방침이다.
백두산 호랑이 체계는 워리어플랫폼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신속하게 전장에 투입, 실시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방탄기능과 정찰장비, 원격사격통제체계(RCWS) 등을 갖춘 차륜형 장갑차와 K-200 장갑차, 소형전술차량 등이 분대 단위까지 배치되면서, 전통적 의미의 보병은 사라지게 된다.
차량에 탑승한 보병은 필수품만 휴대하고 전투를 치르게 된다. 다른 장비들은 차량에 남겨놓을 수 있어 기동력이 높아진다. 차량 엔진을 통해 동력을 만들어 열상 및 광학 조준장치에 공급하면 4㎞ 이상의 범위를 감시할 수 있다.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가 추가되면 2㎞ 이내의 적을 타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보병의 전투를 지원하는 효과가 커지는 셈이다.
드론이 촬영한 영상은 병사들의 휴대용 및 차량 탑재 단말기는 물론 전장정보시스템 등을 통해 후방의 지휘부와 지원부대에도 실시간 제공된다. 아군 지휘관의 결정과 작전계획, 물자보급 상황도 함께 공유된다.
육군은 올해부터 2021년까지 육군 최초로 K-808 차륜형 장갑차를 전력화한 25사단을 대상으로 전투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2022~2023년 원격사격통제체계, 신형 무전기, 위치 보고 장비 등을 시험 적용해 각 부대를 실시간 연결하는 네트워크화를 추진한다. 이후 2030년까지 백두산 호랑이 체계를 전 부대에 확대, 워리어플랫폼과 드론봇(드론+로봇) 등을 통합한 미래형 지상전투체계를 완성할 예정이다.
◆‘전면전→국지전 대비’로 옮겨가는 모습
육군의 이같은 정책은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 양상이 변화하는 조짐을 보이는 것과 맞물려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2018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 지상군은 17개 군단과 81개 사단, 131개 여단 예하에 전차 4300여대, 장갑차 2500여대, 야포 8600여문, 방사포 5500여문을 보유하고 있다. 규모로 따지면 세계 최고 수준의 기계화부대를 갖춘 북한으로서는 6.25 전쟁 당시처럼 전차를 앞세워 전면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남북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면서 양측의 군사력 차이도 빠르게 좁혀졌다.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재래식 전력 강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차와 미사일 등에 대한 개량작업은 계속됐지만, 최신 무기를 일선 부대에 전면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북한이 탄도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집중한 것도 기존의 재래식 군비경쟁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제2의 6.25 전쟁’에 대한 우려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우리 군의 전략은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기존처럼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는 수준을 넘어서 공격적 성격이 강한 입체기동작전으로 양상이 변화했다. 이동이 자유로운 바다와 하늘을 통해 지상에서 동시에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하는 입체기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전격전과 1967년 3차 중동전쟁,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쟁의 교훈에 과학기술 발전 추세가 결합됐다.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단기간에 제압한 미군의 입체기동작전에 자극받은 우리 군은 1990년대 말 입체고속기동전 개념을 수립했다. 여기에 사이버전과 전자전 같은 비(非)물리적 수단과 첨단 과학기술이 결합된 것이 입체기동작전이다.
입체기동작전의 가장 큰 단점은 전후 안정화 단계에서 발생한다. 2003년 이라크전쟁 당시 미군은 바그다드로 신속하게 진격,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라크 전역에 남아있던 정부군과 민병대의 저항으로 전쟁 당시보다 전후 안정화 단계에서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 마을에 숨어든 무장세력들은 급조폭발물(IED)과 RPG-7 로켓탄과 트럭 탑재 기관총 등으로 미군을 몰아붙였다. 이에 미군은 무장 험비와 지뢰방호차량(MRAP), 중형전술차량(MATV)을 잇달아 투입하고 개인전투장구류와 장비를 개선하는 등의 작업을 거쳤다.
한반도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 입체기동작전으로 북한 전쟁지도부를 무너뜨려도 교도대와 노농적위군 등 예비군들은 이라크전쟁처럼 우리 군의 북한 지역 안정화 작전을 저지할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 군의 대비태세는 매우 취약하다. 트럭과 지프 외에 보병부대가 이용할 수 있는 장비는 많지 않고, 기계화부대는 전면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안정화 작전에 투입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전쟁의 장기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보병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감시장비나 중화기를 탑재한 전술차량을 배치해 무장세력과 교전할 소대, 분대 단위 보병들을 지원하며, 중대급 이상 부대는 차륜형 장갑차를 추가해 화력과 기동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다만 북한의 열악한 도로 사정과 험한 지형을 감안하면, 미군의 MATV 수준의 기동성과 신뢰성이 확보된 차량이 필요하다. 보병 개개인도 워리어 플랫폼으로 무장한다면 무장세력을 격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육군이 추진중인 백두산 호랑이 체계와 워리어 플랫폼은 1950년대 이후 60여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보병 전투체계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시스템이다. 입체기동작전과 함께 진행되는 혁신의 뒷면에는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는’ 기존 전투방식이 ‘북한을 제압하는’ 형태로 바뀌는, 한반도 무력충돌 양상의 변화가 숨어있다. 이같은 변화에 맞춰 혁신에 나선 육군의 미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지켜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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