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인 14일 재미동포들의 기증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신궁(神宮) 터 부근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다. 치욕의 현장이 극일(克日)의 현장으로 거듭나는 셈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정권의 반한(反韓) 정책으로 한·일 갈등이 격화하는 시점이어서 관심이 모아진다.
◆치욕의 현장에서 극일의 성지로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김진덕·정경식재단(이하 재단)과 서울시,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재단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조선신궁터 인근에 위안부 기림비를 기증한다. 재미동포 사업가인 고(故) 김진덕·정경식 부부의 이름을 딴 재단은 미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와 독도 홍보 사업을 활발히 펼쳐왔다. 2017년엔 미국 내 위안부 피해 13개국 커뮤니티로 구성된 ‘위안부 정의연대’ 및 한인 동포들과 함께 미국 대도시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주도한 곳이다.
조선신궁은 과거 한반도 지배의 상징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일왕가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한 메이지(明治) 일왕을 제사하기 위해 1925년 한양도성을 부수고 건립했다. 1945년 해방 후엔 조선민중이 훼손할 것을 우려해 일제 측이 직접 해체·소각할 정도였다. 이곳에는 이미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안중근의사광장이 조성돼 있어 기림비가 건립되면 극일 성지로서의 상징이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인근에는 백범광장공원이 있으며, 한양도성 현장유적박물관 조성 공사도 한창이다.
기림비는 1991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한국·중국·필리핀 소녀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를 만든 영국계 미국인 조각가 스티븐 와이트의 ‘강인함의 기둥’이라는 작품으로,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와 유사해 쌍둥이 동생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쌍둥이 동상이지만 다른 점도 있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는 세 소녀가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는 일반 시민이 세 소녀와 함께 손을 잡을 수 있는 빈자리를 남겨 두었다. 차가운 동상(銅像)을 통해 따뜻한 동감(同感)을 느끼게 하는 배려다.
기림비가 세워질 곳은 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건물 앞. 지난 10일 기림비 건립 예정지에서 바라보니 탁 트인 공간 사이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한양도성발굴터에 안내센터가 지어지면 센터 앞마당에서 시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조형물이 될 것이라는 게 서울시 예상이다.
지난 4일 위안부 피해 할머니 한 분이 숨져 생존 피해자는 20명으로 줄었다.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던 범죄는 이제 기록에 의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김학순 할머니와 세계 다른 피해 국가 소녀들이 연대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번 기림비는 역사 및 세계 인권 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곳곳에서 도운 끝에… 우여곡절 한국 도착
이번 프로젝트는 한때 좌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시 측과 재단 측은 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위안부기림일에 맞춰 재단이 기림비를 기증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그런데 지난 6월 초 완성된 기림비를 한국으로 가는 화물선에 싣기 직전, 시는 재단 측에 ‘선적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는 해당 부지가 서울시교육청 소유임을 파악하고, 기림비가 다 완성된 뒤인 6월 말이 되어서야 시교육청에 부지임대협조 요청을 보냈다. 6월 25일 시 공공미술위원회 심의 통과를 거쳐 지난달 15일 부지 사용 허가를 최종 완료했다. 서울시 윤희천 여성정책담당관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내부 절차가 빡빡했고 위원회 통과가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보류를 요청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선적을 늦출 경우 올해 기림일에 맞춰 제막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재단 측은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될까 발을 동동 굴렀다는 후문이다. 그러던 중 위안부 이슈를 취재하다 사정을 알게 된 교육방송(EBS)의 허성호 PD가 자신이 한국에서 기림비를 받아 어떻게든 맡아두겠다고 나선 덕에, 기림비는 한 달 동안 태평양을 건너 지난달 17일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단의 김한일 대표는 “허 PD님이 아니었다면 기림비는 지금도 미국 작업실 창고에 있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 PD는 “회사의 양해를 구해 통제구역에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기림비는 재단만의 성과물이 아니다. 기림비가 완성될 때까지 작지 않은 재미동포의 정성이 모였다. 김한일 대표는 “와이트가 처음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를 디자인할 때, 영국 출신인 그에게 한복 옷고름 모양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며 저고리를 들고 작업실로 찾아간 동포분까지 있었다. 그래서 김학순 할머니의 한복 모습이 꽤 정확하다”며 “한인 커뮤니티 구성원 모두 기여하지 않은 분이 없다”고 밝혔다.
14일 기림비 제막식에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해외 인사도 다수 참석한다. 2007년 미국 연방의회의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냈던 일본계 마이크 혼다 전 연방 하원의원, 위안부 정의연대를 이끌고 있는 중국계 줄리 탱·릴리안 싱 판사, 조각가 와이트 등이다. 샌프란시스코한인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샌프란시스코지회, 재미한국학교 북가주협회 등 재미동포단체 관계자들도 찾는다.
◆위안부 문제의 버팀목, 미주동포 사회
서울 기림비는 전 세계 위안부 피해를 입은 13개 국가에 기림비를 세우려는 글로벌 프로젝트의 시작이기도 하다. 김한일 대표는 2년 전 미국 내 다른 국가 출신 커뮤니티들과 합심해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를 세울 때 이 프로젝트를 이루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13개국은 한국과 북한을 포함해 일본, 중국, 대만, 네덜란드, 필리핀 등이다.
김한일 대표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를 위해 한국계 커뮤니티에서 모금을 하면서 중국계는 왜 참여하는지, 소녀상 중 필리핀 소녀는 왜 있는지 등의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한국에 소녀상이 적잖이 있다 보니 한국인 피해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다른 나라 피해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다면 다른 나라에도 기림비를 세워,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 내 13개 커뮤니티 공동의 일이라는 것, 나아가 함께 힘을 합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세계인의 노력을 일본 정부는 집요하게 훼방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에서 10㎝도 안 되는 소녀상이 일본대사관의 집요한 항의에 전시가 취소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건립 이후 자매도시 관계였던 오사카(大阪)시는 샌프란시스코시와 자매결연 관계를 끊는 등 압박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의 압력을 샌프란시스코시가 버텨낸 배경에는 13개 커뮤니티가 힘을 합쳤던 덕분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정부의 압박을 목도한 김한일 대표는 이번 서울 기림비 건립이 방해받을까 마음을 졸이며 보안을 유지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앞장섰던 재미동포와 중국, 필리핀 등 13개 커뮤니티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아픔과 일제 잔악상을 기록한 위안부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촉구하는 청원운동도 펼치고 있다.
세계 정치의 중심인 미국에서 전개되는 재미동포 등의 활동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고하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 특히 한·일 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보편 인권문제, 전시 성폭력 문제로 글로벌 이슈가 된 것은 국내 노력뿐 아니라 해외에서 동포들의 캠페인과 시민운동 및 의회 네트워킹 등의 노력도 결정적이었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은 “최근 유엔 인종차별위원회, 강제실종위원회에서 잇따라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합의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주장을 일축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를 전제로 하는 해결만이 진정한 해결임을 강조하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보편적인 인권 문제의 원칙을 확고히 적용하게 된 배경에는 한인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풀뿌리 시민 연대 활동이 토대를 닦은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김순란 재단 이사장은 “서울 기림비 역시 성폭력 근절을 위한 울림의 장소이자 인권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서울=글·사진=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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