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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의 행복한 세상] 견의사리(見義思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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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2 10:10:18 수정 : 2019-09-12 1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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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위대한 스승인 공자도 시쳇말로 흙수저였다. 아버지 숙량홀이 70살에 아들을 낳기 위해 세 번째로 맞은 부인이 바로 어머니 안징재였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정상적인 혼인관계로 보기 어려웠다. 옛 문헌에선 ‘야합(野合)’이라고 칭했던 이유이다.

 

그나마 아버지는 공자가 3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17살 때 눈을 감았다. 공자는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지독한 가난으로 끼니를 굶는 일이 많았다. 스무 살 때 노나라 권력자 계(季)씨 가문의 창고지기로 취직했고 축사지기 노릇도 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영락없는 비정규직이다.

 

스무 살 무렵에 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계씨가 선비들을 대접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틈틈이 학문을 갈고 닦았던 공자도 참석하려고 했으나 계씨의 가신은 “선비를 대접하자는 것이지 너 같은 놈을 대접하자는 게 아니다”며 내쫓았다. 그 이후 공자는 더욱 학문에 정진했다. 자신의 불운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쪽으로 매진했다.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고위층 인사들이 그에게 예법을 배울 정도로 그의 이름이 나라에 널리 퍼졌다.

 

공자의 고향인 중국 곡부에 가면 계탐도(戒貪圖)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계탐도에 그려진 동물은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비늘을 가지고 있는 상상의 동물이다. 이 동물은 배가 터질 정도로 부른 모습이다. 그런데도 자기 앞에 있는 태양까지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다. 만약 태양을 먹는다면 스스로 타죽을 수밖에 없다. 자기 파멸의 결과가 기다리는 데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파멸의 길을 걷는 이들이 요즘 주위에 즐비하다.

 

흙수저였던 공자가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것은 계탐도를 경계로 삼아 스스로 탐욕을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득을 보면 그것이 옳은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를 평생 실천했다. 안중근 의사는 공자의 정신을 본받아 뤼순 감옥에서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란 글귀를 남겼다.

 

요즘에는 공자와 안중근의 가르침을 거꾸로 행하면서 안중근의 애국을 입에 올리는 소인들이 너무 많다. 정의를 간판으로 내건 가게에선 정의가 없고, 민주의 간판을 단 가게 사람들의 안중에는 민(民)이 없다. 견의사리(見義思利)! 옳은 일을 보고도 눈앞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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