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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입력 : 2019-10-29 10:23:34 수정 : 2019-10-29 14: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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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 연대기의 한 장면. 아버지 김태용 역을 맡은 배우 남명렬(맨 오른쪽)이 술김에 대구 시내에서 ‘데모가’를 부르다 경찰서에서 취조받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거의 증발한 유년 기억이지만 뚜렷하게 기억나는 사건도 몇 있는데 10·26이 그렇다. 기자에게는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심각하게 읽던 신문에 큼직하게 적혀있던 ‘대통령 유고(有故)’를 보고 ‘유고(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있음)’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아침이다. 답을 얻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더 물어봐야 좋을게 없겠구나’하고 무거웠던 분위기에 입을 닫았던 듯하다.

 

초연 이후 6년 만에 무대에 오른 국립극단의 ‘알리바이 연대기’는 기자와 동년배인 김재엽 극작가 겸 연출가가 촘촘하게 복구한 자신의 가족사를 씨줄 삼아, 굵직한 현대사를 날줄로 엮어 만든 연극이다. 1930년부터 1979년까지를 다루는 1막은 부친으로부터 “너는 조선사람이니까 울 필요 없다”는 말을 들으며 일본 오사카에서 해방을 맞게 된 아버지 고 김태용 씨 연대기다. 광복 후 대구 구미로 귀환하는데 일제 관동군 출신으로서 낙향거사 신세였던 박정희와 한 동네였다. 그러다 6·25를 거쳐 대구 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정착한다.

2막은 1980년부터 2013년까지 아버지와 아들 재진, 재엽 형제의 이야기다. 정변으로 얼룩진 군사정권 시절 아버지는 자신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아버지는 한때 직장상사이자 지도자로 모셨던 장준하 추락사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 아들에게 “너는 언제든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쪽에 서야 한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래야 너와 네 가족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거란다”라고 신신당부한다.

 

공연시간은 160분으로 꽤 길다. 하지만 ‘응답하라 19XX’시리즈처럼 꼼꼼한 복기로 만들어진 보통가족의 희로애락에 얽힌 현대사를 보는 재미 덕분에 잠시도 지루하지 않다.

 

이런 식이다. 야구팬에게 1986년 10월은 숙명의 라이벌 삼성과 해태가 코리안시리즈 패권을 놓고 명승부를 벌인 시간으로 기억된다. 해태는 끈질긴 집념으로 연거푸 역전승을 거두며 삼성을 4승 1패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4회 연속 우승’의 신화를 시작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는 걸 보여준 이 승부를 대구에서 ‘직관’하고 해태 버스가 삼성 팬 공격에 불타오르는 장면까지 목격한 소년 재엽이는 이렇게 말한다. “난 이해할 수 없었어. 삼성 타자들의 헬멧에는 언제나 ‘삼성 하이테크TV’가 찍혀 있었지. 근데 해태 타자들의 헬멧에는 겨우 ‘맛동산‘이라고 쓰여있었거든. 이게, 비교가 돼? 근데, 맨날 ‘맛동산’한테 지는 거야!”

연극은 이처럼 광복의 순간, 한국전쟁, 1971년 대선 김대중 후보 유세, 1986년 서울 대학가 분신 정국, 1989년 전교조 운동, 1995년 5·18특별법 제정 집회,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등 현대사 굵직한 사건을 보통사람 정서로 돌이켜본다. ‘운동권’이 마지막 빛을 발하던 90년대 대학생이었던 재엽의 연대기에선 ‘연희동 전두환 체포 결사대 남총련’의 사연과 맹활약이 눈물겹다. 민주화운동시대 집회 현장에선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가 특유의 전투력으로 명성 높았는데 이들을 통칭하는 ‘남총련’은 왕년의 전설이다.

 

이번 무대에선 6년만인데도 초연 때 출연진이 거의 그대로 다시 모였다. 극 중 화자(話者)로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재엽 역의 정원조, 형 재진 역의 이종무가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아버지와 재엽을 뺀 나머지 배우는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야했는데 특히 삼부자의 소년 시절을 맡은 지춘성과 ‘남총련’역의 유병훈이 무대에 재미와 활기를 불어넣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김태용 역을 맡은 중견배우 남명렬 연기가 빼어났다. 오랫동안 쌓아온 내공을 바탕으로 과장없이 담백하면서도 깊은 공감을 일으키는,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였다. 소설가를 꿈꾸는 아들에게 작가 최인훈의 ‘광장’을 언급하는 모습에선 소설 속 주인공처럼 대결의 시대에 어디에도 마음 둘 수 없었던 지식인의 회한(悔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그의 일대기 끝에 나오는 병상 연기에 객석 곳곳은 눈시울을 적셨다.      

 

작가·연출로서 김재엽은 이처럼 자신의 기억을 모아 재현한 선친 일생을 통해 우리 시대 아버지를 위한 헌사를 썼다. 한때는 꿈많은 청년으로, 그리고 나머지 삶은 고단한 가장으로서 두 발로 부지런히 자전거를 타듯 삶을 꾸려온 인생이다. ‘알리바이’라는 작품 화두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실마리가 풀린다. 원래 뜻은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가장 강력한 무죄 입증 방법이다. 이 작품에선 현대사에서 권력자들이 꾸며 온 책임전가와 저항세력에 대한 도덕적 공격, 분열과 차별을 이용한 통치술, 그리고 격동의 시대에 소시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택해야 했던 일상의 알리바이를 뜻한다. 초연때부터 온갖 상을 휩쓴 작품이지만 한가지 궁금한 점은 작가와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객, 가령 ‘90년대생’에겐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날 온통 깜깜한채 고요했던 대구의 밤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있을까.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1월 10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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