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화재로 일본 오키나와현 슈리성의 주요 건물이 소실됐다. 슈리성 유적은 나키진 성터 등 8개 유적과 함께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의 하나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더하다. 슈리성이 조선과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맺은 류큐(琉球·일본 오키나와현에 있었던 왕조)의 심장과도 같은 곳으로 그 원형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류큐는 명나라, 여진, 일본과 더불어 전기 조선의 4대 교역국 중 하나였다. 조선 전기에 50여 회에 걸쳐 사절을 파견했고, 임진왜란 전에는 일본의 침략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정확한 창건시기는 파악되지 않으나 14세기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슈리성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특히 슈리성의 중심건물인 세이덴[正展]의 초기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실록의 이런 기록은 17세기 이전에는 류큐인들 스스로 자국사를 기록한 것이 전하지 않아 의미가 더욱 크다.
류큐와 관련된 기록은 ‘태조실록’에서부터 등장한다. 14세기 류큐는 ‘주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으로 나뉜 세력이 다툼을 벌였다. 이중 난잔왕의 아들 쇼삿토가 조선으로 망명해와 1394년 주잔왕이 송환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전한다. 류큐를 이끌던 한 세력의 수장이 조선에 망명해 올 정도로 양국의 관계가 깊었던 것이다.
슈리성 세이덴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은 ‘단종실록’의 1453년 기사에 남아 있다. 류큐에 표류했던 조선인 2명이 어렵사리 귀국한 후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 “류큐 국왕은 조회시에 ‘3층의 세이덴 위’에 앉아 있다”고 말한 것 등이다. 실제 세이덴은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진술 중에는 “류큐 국왕은 1월과 2월 사이에 조회를 받는다”, “군신들은 사모관대하여 마당 아래에서 알현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세조실록’에는 또 다른 표류민이 “왕성(슈리성)은 대체로 삼중으로 되어 있어 외성에 창고와 마구간이 있었다”고 전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표류민은 “내성에는 2·3층 건물이 있었다. 대체로 근정전과 비슷했다”는 말까지 보탰다. 국왕의 전용 통로인 ‘우키미치’〔浮道〕 를 두고 그 좌우에 왕족이나 대신급 신하들이 줄을 지어 서며 엄격한 서열을 표시한 것은 근정전의 운용 방식과 닮은 것이기도 하다.
실록이 전하는 당시 슈리성을 정리하면 현재의 모습과 대체로 일치한다.
“성벽은 삼중으로 되어 있었고, 성벽이 구불구불한 물길처럼 되어 있었다. 핵심 건물은 이층 누각이고, 벽은 붉은 색으로 칠해졌으며 지붕은 판자지붕이고 금속으로 덮여 있었다. 건물 안에는 상층에 진귀한 보석이 저장되고 하층에 술과 음식을 보관했다. 국왕은 중층에 거주하였고, 외관은 2층이나 실제로는 3층 건물이었다.”
1471년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도 류큐의 모습을 전하는 우리 기록이다. 이 책에 실린 ‘유구국도’는 현전하는 류큐 지도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구국도는 원형 울타리의 서쪽에 이중으로 울타리가 덧그려져 있어 “왕성은 삼중”이라는 실록의 기술과 같다.
조선이 석성 축조 경험과 기술을 류큐로부터 수입하려 했다는 사실은 슈리성과 한국사의 한 접점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조선이 류큐에서 수입한 것은 소목, 후추, 유황, 사탕 등 원재료, 특산물이 대부분이었는데, 문화적 성격이 강한 석성 축조술을 들여오려했다는 것은 양국 교류의 양상에서 이례적인 대목으로 보인다.
류큐는 오래전부터 ‘구스쿠’라 불리는 석성의 축조에 매우 능숙했다. 슈리성이나 중성, 옥릉 등은 이런 역량을 증명하는 건축물이다. 조선은 왜구 방비책의 일환으로 류큐의 성벽 축조 기술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류큐식 축조 방식을 사용해 성벽을 실제로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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