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을 함께하는 책과 그림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고 며칠 남지 않았다. 유독 따뜻한 날씨 탓에 실감이 나지 않지만 거리 풍경을 보니 연말이 온 것이 분명하다. 백화점 앞에는 대형 트리가 들어섰고 가로수에는 조명이 걸렸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도 가만히 들어보면 송년과 신년을 축복하는 말들이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읽으려 기억해 둔 책이 있다. 김연수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글의 중간마다 젊은 날 즐겨 읽었던 시구와 문장들을 덧붙인다. 이백과 두보의 시, 이덕무와 이용휴의 산문 등을 인용하는 식이다. 이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소설가 김애란이 말했듯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오래된 글이지만 그것은 우리 곁에 남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 있었다. 거실 한쪽에 앉아 오래된 책을 꺼내어 다시 읽었다. 마음에 담고 싶은 문장을 입으로 몇 번씩 외며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책을 덮을 무렵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바로 허수영의 개인전에서 언젠가 보았던 작품이었다. 그가 시간의 흔적을 켜켜이 쌓아 올린 풍경화였다.
#한 권의 책, 한 점의 그림
허수영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자하미술관, 인사미술공간, 학고재 등에서 개인전, 금호미술관, OCI 미술관 등에서 그룹전에 출품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자하미술관, OCI미술관, 아르코미술관 아카이브 등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했다. 그 사이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금호창작스튜디오, 광주시립미술관 양산동 창작스튜디오 등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굵직한 경험의 밑동이 되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작품 세계다. 허수영은 학창 시절 대형 서점을 찾아 동식물 도감을 수집했다. 표본으로 엄선하여 담은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이미지 자료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그렇게 도감을 즐겨 보다가 책 속의 다양한 새들이 같은 하늘을 나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졌다. 책을 한 장씩 넘기며 필사를 하듯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는 새 무리가 됐다.
새 이후에 해양 생물, 식물 등을 그리고 ‘한 권의 책 한 점의 그림’이라는 연작을 발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작품은 새, 해양 생물, 식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그리는 것이 됐다. 책 안의 방대한 정보량을 하나의 작품으로 남기는 과정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만나도 그려낼 수 있다는 용기를 내는 원천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수록 더 나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점점 더 두꺼운 책을 그리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책 속 수많은 개체가 담긴 풍경을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물고기 도감을 펼친 채 가장 멀리 있는 물고기를 그리고 물을 한 겹 바르고, 그 앞에 있는 물고기를 그리고 물을 한 겹 바르는 과정을 반복했다. 나열하고 배열하듯 그리던 그림이 중첩하고 원근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려낸 허수영의 그림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원근법을 포함한 회화의 기본을 넘어서지 않으며 아우라와 힘을 가진다.
#일 년
허수영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일 년’이라고 부르는 연작이다. 이 연작은 2012년 광주에 위치한 양산동 창작스튜디오에서 시작했다. 당시 허수영은 미술 기관들이 마련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작업실을 사용했다. 프로그램은 보통 1년 단위로 운영되었고 작가는 그때마다 이사를 했다. 책은 언제든 그릴 수 있으니 머무는 기간 동안 머무는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작업을 떠올렸다. 그것이 그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자신에게 의미를 남길 것 같았다.
작업실 주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사생한 것이 처음이었다. 추운 날씨에 앙상하게 가지만 있던 나무를 그렸다. 그 위에 연두색 싹이 올라오면 그것을 그렸다. 여름에는 싹 위에 무성한 푸른 잎을 그렸다. 가을에는 푸른 잎 위에 붉은 단풍을 그렸다. 겨울에는 붉은 단풍을 덮은 눈을 그렸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장면은 더해졌다. 이렇게 사계절이 한 화면에 누적하면 비로소 한 작품이 끝났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떠올린 ‘산양리10’(2014)도 이 연작 중 하나다. 경기도 이천 산양리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지내며 그린 그림이다. 화면 앞쪽에 피어 있는 들꽃의 노란색이 시선을 잡는다. 하지만 그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은 그 뒤의 풍경들이다. 봄의 풍경 사이로 보이는 앙상한 가지에서 느껴지는 다른 계절의 공기. 그 모든 것을 덮었던 듯 남은 눈의 흔적. 공기와 흔적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 작품은 몇 년 전 열린 작가의 개인전 전시장 입구에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돌이 흩어져 있는 풍경에서 시작했다는 작가의 설명을 들었다. 3미터에 이르는 대형 화면은 한 겹의 물감을 칠하는 것에도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다. 그는 이 화면 위에 몇 겹의 붓질을 하며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성심을 다한 작품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하나의 캔버스 위에 오롯이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 공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중첩된 풍경과 서로 다른 시간들이 혼재된 순간이 펼쳐진다. 기억들이 모여 추억이 되듯이, 재현들이 모여 표현이 되듯이, 정지된 공간의 순간들을 모아 흐르는 시간의 모호한 무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작가는 이 무렵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리서치트립에 선정되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케냐, 탄자니아 등 몇몇 국가를 방문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보며 존재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킬리만자로에 오르며 고도에 따라 변하는 풍경을 보았고 계절을 시간과 맞물려 단언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후 한국에서의 삶에서도 전에 없던 경험과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최근의 작업에 드러나며 그의 작품 세계를 더 깊게 하고 있다.
#태도가 담긴 작품, 태도가 담긴 삶
허수영의 작업 과정은 때로 사진으로 남는다. 작가가 찍은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지인이 작업실에 왔다가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면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담벼락 너머 집이 보이는 풍경에서 시작했다가 나무 덩굴의 모습으로 남은 작품도 있다. 그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니 물감으로 덮인 지난 풍경들이 내 눈에는 마냥 아깝다. 그래도 작가가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그리는 그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다.
허수영은 봄, 여름, 가을을 거치고 나서야 그려낸 겨울에서 진짜 겨울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허수영의 작품은 시간과 장소를 그린 것이지만 결국은 허수영이라는 작가의 태도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새 도감을 그린 뒤 새를 그린 것이 아니라 책을 그린 것이라고 말했듯 말이다.
허수영의 그림을 보며 김연수 책을 읽고 했던 생각을 되새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올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기보다 감사하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내가 가질 어떤 태도의 바탕이 되기를 바라며. 수고했던 지난 일 년이라는 시간에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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