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의 불씨를 지폈던 시인 최영미(59·사진)가 그간 논란이 됐던 세번째 시집 ‘돼지들에게’의 배경에 대해 입을 열었다. 2005년 시집이 출간된 지 15년 만이다.
최 시인은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의 카페에서 열린 ‘돼지들에게’(이미출판사) 개정 증보판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시집에 등장하는 ‘돼지들’에 대한 구체적 경험과 해당 인물의 신상을 설명했다.
그는 “실명은 밝힐 수 없지만 어떤 문화·예술계 인물이 돼지의 모델”이라며 “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온, 문화예술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권력자”라고 묘사했다.
이어 “2004년쯤 이 인사를 만났는데, 성희롱까지는 아니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담긴 말을 듣고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며 ”그를 만난 뒤 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이런 시를 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이고, 첫 문장을 쓰게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최 시인은 더 구체적인 이야기도 밝혔으나, 이 부분은 언론에 보도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나아가 1987년 대통령선거 때 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캠프에서 활동하면서 당한 성추행도 폭로했다.
선거철에 24시간 합숙하면서 한 방에 스무명씩 겹쳐서 잤는데, 누군가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
최 시인은 “나만 겪은 게 아니라 그 단체 안에서 심각한 성폭력이 있었다”며 “그 현장을 목격하며 회의를 느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에 여자 선배에게 상담을 요청했지만 “네가 운동을 계속하려면 더 심한 일도 참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도 밝혔다.
더불어 최 시인은 모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와 술자리를 가지고 택시를 함께 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고도 폭로했다.
최 시인은 2017년 발표한 시 ‘괴물’을 통해 선배 시인 고은의 성추행을 폭로,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탓에 고 시인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으나 지난해 11월 2심에서 승소했고, 결국 고 시인은 상고를 포기했다.
한편 최 시인은 최근 불거진 이상문학상 사태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그는 “미투가 없었다면 이게 가능했을까 싶다”며 ”문단이 정말 깨기 힘든 곳인데, 여성 작가들이 용기를 내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게 굉장히 고무적이었다”며 뿌듯해했다.
이어 “‘세상이 조금은 변화하는구나. 약간은 발언하기 편하도록 균열을 냈구나. 내 인생이 허망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문학사상사가 1977년 제정, 국내를 대표하는 문학상 중 하나인 이상문학상은 44회를 맞은 올해 수상자를 정했으나 공식 발표하지 못했다.
우수상 수상자로 통보받은 소설가 김금희 등이 ‘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출판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상을 받지 않기로 한 데 따른 고육지책이었다.
최승우 온라인 뉴스 기자 loonytun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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