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이런 곳이 있어?” 요즘 인터넷으로 강원도 영월 여행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핫플레이스가 있다. 푸른 하늘, 초록의 산들과 확연하게 대비되며 쭉쭉 뻗어 올라간 강렬한 빨간색 대나무 숲. 시선을 확 잡아끌기에 충분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장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랜선 여행’을 하던 누리꾼들은 깜짝 놀란다. 영월을 거대한 설치미술 공간으로 새롭게 바꾼 젊은달 와이파크의 상징 ‘붉은 대나무’다. 미술관 주차장으로 들어서 사진 속 장면을 직접 보니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대나무숲 속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 마치 록가수처럼 어깨를 덮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기른 치렁치렁한 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에서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 그의 옆에는 손을 꼭 잡은 아내가 다정하게 섰다. 강릉 하슬라 아트월드에 이어 영월 젊은달 와이파크를 창조해 강원도를 거대한 설치미술의 성지로 바꾸고 있는 조각가 최옥영(61)·박신정(58)씨 부부다.
#거대한 설치미술로 우주를 담다
안으로 들어서니 카페에는 초콜릿과 고구마를 버무린 듯한 맛있는 커피향이 가득하다. 박신정 하슬라월드 대표는 “모든 커피를 직접 로스팅하므로 신선한 맛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와이파크가 실내와 실외를 오가는 워낙 넓은 미술관이다 보니 쉬어 갈 공간인 카페 하나쯤은 꼭 필요해 보인다.
시그니처 작품 붉은 대나무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는지 가장 궁금했다. 건축할 때 쓰는 금속파이프 여러 개를 이었는데 연결 마디 때문에 멀리서 보면 대나무처럼 보인다.
“영월의 상징은 초록의 소나무랍니다. 여기에 가장 대비가 잘되는 색은 빨간색이에요. 영구적으로 오래가고 단단하게 모양을 잘 잡아줄 수 있는 소재를 고민하다가 파이프를 생각해냈죠.” 최대한 자연과 잘 어우러지도록 대나무 숲으로 구상했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그를 따라 작품 속으로 더 들어간다. 카페를 지나면 ‘목성’이다. 소나무를 엮어 만들었는데 이탈리아 로마의 판테온처럼 천장이 둥그렇게 뚫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왜 목성인지 알겠다. 뚫린 천장은 목성이 되고 엮은 소나무 틈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마치 은하수의 별무리 같아 우주의 한 공간에 서 있는 듯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진다.
“신기하죠. 깨지고 부서진 것의 결합체가 이런 에너지를 낸답니다. 평소에 늘 무한한 우주에 사로잡혀 있어요. 우주를 어떻게 조화롭게 표현할까 고민하죠. 우주의 크기와 사람 뇌의 크기는 같다고 봅니다. 목성과 사람의 교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죠. 에너지를 모아주고 에너지 덩어리인 사람이 교감하는 곳이라고 할까요. 우주의 공간, 소리, 빛, 에너지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데 명상하는 친구들은 누워서 보면 우주와 더 교감이 잘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설치미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 최 교수도 목성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물주가 인간을 다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어요.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면서 진화해 나가는 거죠. 마찬가지예요. 설치예술이 대단한 점은 관람객들이 작가가 의도한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죠. 작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느낌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더군요. 따라서 완성도를 너무 높일 필요는 없어요. 나무를 예쁘게 각목으로 만들어 엮었다면 아마 자연미가 떨어져 에너지도 제대로 못 느낄 겁니다. 당신도 우주의 일부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재료의 효과를 잘 살렸다고 볼 수 있죠.” 남편을 거드는 박 대표의 칭찬이다. 목성은 외부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치 새 둥지를 엎어 놓은 모습이라 새 생명이 움트는 공간으로 보인다. 최 작가는 “하늘에서 보면 배꼽처럼 보여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벽과 천장이 온통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시간의 거울 - 사임당이 걷던 길’은 그레이스 박의 작품인데 작가는 바로 박 대표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처럼 환상에 빠지고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게 된다. 우주로 가는 통로를 걷는 듯한 ‘우주정원전’을 지나면 지구 침략에 나서려는 ‘외계의 생명체’가 기다리는 ‘붉은 파빌리온’이 등장한다. 이어지는 레드카펫 같은 ‘바람의 길’을 따라 걸으면 영월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은행원 꿈꾸던 소년 조각에 뛰어들다
강릉상고를 다니며 평범한 은행원을 꿈꾸던 최 작가는 3학년 때 우연히 출전한 실업계고 기능대회 미술분야에서 환경 디자인으로 1등을 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자각했다. 졸업 후 대우중공업, 오리온제과, 삼척 동양시멘트 등을 전전했는데 자유로운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방황하다 국립대 강릉대학교가 문을 열었고 기능대회 1등 상장 덕분에 특기생으로 미대 1기로 합격했다.
박 대표도 경주여고에 다니던 시절부터 ‘예술 DNA’가 몸속에서 꿈틀댔다. 하지만 미술부 학생들은 공부 안 하고 연애나 한다고 부모들이 싫어하던 시절이라 미술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고2 때 부모 몰래 친구를 따라 경주에 처음 생긴 화실을 다니면서 잠재됐던 예술 재능이 폭발했다. 같은 화실의 동국대 미대 오빠들보다 실력이 빨리 늘었고 결국 이화여대 미대로 진학해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국 예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젊은 조각가 모임 ‘가능과 변용전’ 멤버로 활동하며 만났고 최 작가의 오랜 구애 끝에 1990년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부부 조각가의 삶은 고단했다. 작업장이 없던 최 교수는 돌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조치원의 돌 공장인데, 서해안 간척사업에 쓰던 돌을 공짜로 준다고 하더군요. 몸은 고단했지만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 신났죠. 그런데 김영삼정부 들어 대대적인 토지전용 단속이 시작됐고 밭에 설치했던 작품을 갑자기 모두 치워야 했어요. 트럭 30대 분량을 강릉으로 옮긴 뒤 나머지는 땅에 묻었죠. 나중에 찾으러 갔지만 이미 그 위에 집을 지었더라고요 허허.”
#태풍 루사도 꺾지 못한 예술혼
팍팍한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1993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폐교된 강릉 왕산면 왕성분교를 1년 동안 빌려 작업장 겸 조각공원으로 꾸며 나갔다.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한 폐교가 신기했는지 방송을 타면서 하루에도 여행자들이 수백명이나 찾았다. “잡초와 진흙이 가득했던 운동장과 닭장으로 쓰이던 관사가 조각 작품으로 채워지는 모습에 마냥 신나서 밤을 새워 작업에만 몰두했죠. 하지만 직원 2∼3명 인건비도 감당하기 힘들더군요. 작품을 호당 얼마씩 팔 수 있는 작가도 아니고 오직 창작에만 몰두했기에 작품활동으로 얻는 수입은 거의 없었어요. 우리가 원한 핑크빛 미래가 아니었죠.” 박 대표와 최 작가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정동진의 산을 매입해서 ‘비판적인 현대미술’을 창조하는 공간을 새로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강릉의 옛지명을 딴 하슬라 아트월드다.
2002년 8월. 하슬라 아트월드는 허가의 마지막 단계를 남겨 놓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그들의 예술혼을 질투했다. 무서운 폭우가 쏟아졌고 산사태가 폐교 작업장으로 밀려왔다. 박 대표는 어린 세 아이들을 끌고 무작정 산꼭대기로 올라가 동이 틀 때까지 비를 맞으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비가 그치고 가보니 작업장은 반 토막 났더군요. 안에 계속 있었으면 아마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하슬라로 옮길 준비를 하던 10년 동안 만든 작품 105점이 모두 산사태로 사라지고 말았다.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군요. 높이 8m에 무게가 10t이나 되는 작품까지 모두 없어졌죠. 그중에는 1년 6개월 동안 캐나다산 붉은 소나무를 도끼로 다듬은 지름 2m, 길이 8m 작품도 있었는데….” 그때 일이 떠오른 듯 최 작가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하지만 루사가 남긴 교훈도 적지 않았다. “단지 기존 작품을 옮겨 놓는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하늘이 경고한 거예요. 하슬라의 지형을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닫고 아트월드 설계를 다시 했죠. 공간을 이용하고 변형했어요.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듯 포클레인으로 드로잉을 하면서 하슬라 아트월드를 만들어 갔답니다. 덕분에 포클레인 다루는 기술은 이제 노련한 중장비 기사 못지않답니다.”
#강원도를 설치미술 성지로 만드는 꿈
산꼭대기 33만여㎡에 예술공원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주변에서 모두 “미쳤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2003년 10월 오픈한 하슬라 아트월드는 이제 작품 3000점으로 채워졌다. 하슬라는 지난해 연간 유료 방문객이 16만명을 넘어섰고 지난해 6월 중순 문을 연 젊은달 와이파크도 연말까지 2만명가량 방문할 정도로 강릉과 영월을 찾는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이들은 이제 보다 큰 꿈을 꾸는 중이다. 강원도를 문화예술의 성지로 만드는 일이다. 이미 삼척에서 ‘사고’를 쳤다. 도시재생사업을 펼치는 삼척시 의뢰로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관을 디자인하고 설계했다. 화력발전소와 조선소로 쓰던 공간인데, 높이가 아파트 10층 높이인 30m에 달하고 젊은달 와이파크 부지(2만6400여㎡)보다 무려 10배나 크다. “이르면 2021년 말이나 2022년 초쯤 문을 열 예정입니다. 지름 150㎝짜리 파이프 150개로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이 세워질 겁니다. 상상해 보세요. 바닷물이 미술관으로 직접 들어오고 배를 타고 미술관을 관람하는 모습을. 신나지 않을까요. 아마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관이 탄생할 테니 기대하세요.”
영월=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최옥영 작가는… ●1959년 강원 강릉 출생 ●강릉상고·강릉대 미대·홍익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졸업 ●개인전 국내외 21회 ●현 강릉원주대 미술학과 교수 ●(사)왕산이사장
박신정 작가는… ●1962년 경북 경주출생 ●경주여고·이화여대 조소과·이화여대 대학원 조소과 졸업 ●2003년 하슬라 아트월드 대표 ●2019년 영월 젊은달 와이파크(하슬라아트월드 영월지점) 대표 ●이화여대 강사(2202∼2003년)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강사(2000∼2002년) ●경일대 부교수(1990-2001) ●저서 동네방네 미술관 사임당이 걷던 길, 하슬라아트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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