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엄정 대응과 피해자 보호를 강조해온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4일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국내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47·사법연수원 33기) 검사도 "한마디도 하기 어렵다"며 전날 페이스북을 비활성화했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인 서 검사는 'n번방 사건' 태스크포스(TF) 대외협력팀장도 겸하고 있다.
추 장관은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여러 차례 성범죄에 대한 엄벌 의지를 밝혔다. 그는 "정치 공학이나 선거 공학 등 좌고우면하지 않고 불관용의 원칙을 적용해 성범죄를 뿌리 뽑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추 장관은 2018년 3월 5일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비서 김지은 씨가 JTBC에 출연해 성폭행 피해 사실 등을 폭로하자 당일 곧바로 강경한 조처를 했다.
추 장관은 보도 직후 국회에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한 뒤 직접 회의 결과 브리핑을 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죄송하다"며 출당 및 제명 조치를 결정했다.
추 장관은 "안 지사에게 진상을 확인했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에는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며 "피해자의 얘기로 당이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변했다.
안 지사 의혹이 불거진 직후 '지방의원과의 불륜 의혹' 등이 제기됐다는 이유로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에 대해서도 충남지사 공천을 주지 않았다. 박 전 대변인은 결국 '6·13 지방선거'를 석 달 앞두고 예비후보직을 내려놨다.
당시 박 전 대변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실관계 검증을 위한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도 박 전 대변인을 지지하며 힘을 보탰지만, 추 장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 장관은 지난 1월 취임 후 여성 장관으로서 성범죄 근절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른바 'n번방' 사건과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24) 사건 등이 이슈가 되며 법무부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컸다.
추 장관은 지난 3월 24일 서울고검 2층 의정관에서 브리핑하고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이런 세상에 우리 딸들의 미래가 있겠느냐는 심각한 우려에 대해 대단히 송구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특히 n번방에 가담한 사람 전원에 대한 엄정한 조사와 법정 최고형 구형 등 강력한 처벌을 검찰에 지시했다. 이와 함께 형법상 범죄단체조직죄 적용도 검찰이 검토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4월 10일 유튜브 채널 '법무부 TV'에 게시한 취임 100일 기념 영상에서는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는 디지털 성 착취 바이러스에 대해 무한의 책임을 가지고 무관용의 대처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5월 22일에는 손씨의 미국 송환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에서 "n번방 사건 수사 경과를 보고받고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며 "우리 사회와 사법당국이 적극적인 책무를 다하지 못해 발생한 참사"라고 말했다.
추 장관은 이 밖에도 ▲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여성계 대표 간담회 ▲ 인권교육 간부 세미나 ▲ '젠더 폭력 범죄에 대한 새로운 형사사법 연구' 세미나 등도 개최하며 여성과 아동 폭력 범죄 대응 정책을 구상했다.
추 장관은 박 시장의 사망 다음날인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화꽃 사진과 함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짧은 글만 남겼다. 박 시장 의혹 관련 언급은 하지 않고, '검언유착' 의혹 사건 등에 대한 검찰과 언론을 비판하는 글만 올렸다.
법조계에서는 추 장관이 법무부 수장으로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박 시장이 사망했지만, 성추행 의혹을 밝히는 수사가 필요한지를 두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언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일반적으로 피의자가 사망하면 검찰사건사무규칙에 따라 '공소권 없음' 처리하고 사건을 종결하지만, 이 사안은 사회적인 논란이 큰 만큼 추 장관이 특별수사팀 구성 지시 등 적극적인 수사를 주문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박 시장을 상대로 한 고소 사건 이외에 신상 유포 등 고소인 2차 가해, 경찰과 청와대 사이의 박 시장 피소 정보 누설, 서울시 관계자들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방조 등 각종 고발이 잇따르는 상황이다.
한편 추미애 장관이 14일 수사지휘권 발동 이후 언론의 취재를 '심각한 관음 증세'라며 싸잡아 비판했다.
추 장관은 이날 오후 페이스북에 올린 2217자짜리 글에서 "여성 장관에 대한 언론의 관음 증세가 심각하다. 연가를 내고 산사로 간 첫날 여기저기서 저의 소재를 탐색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며 이후 여러 건의 취재와 보도를 언급했다.
추 장관은 최근 수사지휘권 파동을 계기로 법무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에 대해 "소설 쓰기는 지양돼야 할 것"(10일), "멋대로 상상하고 단정 짓고 비방하지 않기 바란다", "오보 시정을 요청한다. 아니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이상 12일) "회전문식 엉터리 보도관행"(13일) 등 연일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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