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등 일상 곳곳서 단말기 보급 늘어나
시간 오래걸려 뒷사람 눈치에 땀 ‘뻘뻘’
도움 줄 직원 못찾으면 발걸음 돌리기도
공공·민간 키오스크 접근성 수준 60점
“키오스크 메뉴가 보이지 않아서 아무 데나 눌러서 주문하는 경우도 있어요. 혼자서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보니까….”
중증 시각장애인인 박다슬(25)씨는 키오스크(무인단말기) 앞에 설 때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는 화면에 적힌 메뉴나 이미지가 잘 보이지 않다 보니,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뒤 크게 확대해서 확인한다. 그만큼 비장애인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사람이 몰리는 식사시간에는 도움을 요청할 직원이 없으면 아예 다른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박씨는 최근에도 한 패스트푸드점에 갔다가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예방하기 위해 단말기 화면에까지 부착한 항균 필름이 복병이었다. 필름이 옅은 회색빛을 띠는 탓에 스마트폰으로 아무리 확대해 봐도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코로나19 이후로는 대면 접촉을 꺼리는 분위기 탓에 포기하는 일이 늘었다. 박씨는 “자신의 장애를 알리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당장 모든 키오스크에 스크린리더(화면에 나타난 내용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장치)를 설치할 수 없다면, 단말기 주변에 직원 한 분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인건비 절약 차원에서 보급이 확대되는 무인단말기가 장애인들에게는 세상과의 연결을 단절하는 벽이 되고 있다. 오는 15일은 40년 전 세계맹인연합회가 자립과 성취의 뜻을 담아 지정한 ‘흰 지팡이의 날’(시각장애인의 날)이지만, 장애인의 처지는 그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키오스크는 정보 접근성의 문제
지체장애인인 이용석(53)씨에게도 키오스크가 높은 장벽이긴 마찬가지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이씨가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은 화면의 밑 부분뿐이다. 위에는 어떤 메뉴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수년 전만 해도 은행의 ATM 기기를 제외하고는 키오스크를 사용할 일이 드물었지만, 이제는 일상 곳곳에서 단말기가 사람을 대체해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마음에 차지 않아도 차선책을 고를 수 있는 식당은 차라리 사정이 낫다. 단말기를 통해 열차나 비행기 표를 발권해야 하는 경우는 ‘대충’ 찍어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의 정책실장이기도 한 이씨는 “수년 전부터 키오스크 사용에 대한 문제 해결을 정부에 요구해왔지만, 장애인을 배제한 첨단기술만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다”며 “단순히 편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취약 계층을 고려하지 않은 기술 도입이 사회적 비용을 늘릴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는 여러 지하철 역사에 당초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던 점을 예시로 들며 “장애인들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오랜 투쟁을 벌이는 비용을 치르고 난 뒤에야 재공사에 들어갔다. 설계 단계부터 약자에 대한 고려가 있었으면 치르지 않았을 비용”이라고 말했다.
장애인단체의 요구에도 키오스크 사용에 대한 접근성은 여전히 열악한 실정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발표한 장애인 및 노인 등 정보 취약계층에 대한 ‘2019 무인정보단말(키오스크) 정보 접근성 현황조사’에 따르면 공공·민간에 설치된 키오스크의 접근성 수준은 100점 만점 중 평균 59.82점을 기록했다.
◆음성 안내·높낮이 조절되는 키오스크 나올까
지난 6월 제12차 정보통신전략위원회에서 의결된 ‘디지털 포용 추진계획’에는 취약계층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키오스크를 공공성·사업자 규모 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방안이 담겼다. 정부·공공기관 부문은 ‘국가정보화기본법령’을 개정하고 민간부문은 대상사업자와 범위를 마련한 ‘장애인차별금지법령’을 개정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키오스크 개선 방안으로는 △속도 완화 △글자 크기 확대 △음성 안내 △높낮이 조절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러한 개선 사업은 이제 출발 단계로 아직 갈 길이 멀다. 장애인단체에서는 정부가 보다 발 빠르게 정보 취약계층의 현실에 귀를 기울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김철환 활동가는 “정보통신기술 발달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려가 부재한 상황이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었다”며 “정부가 사전에 공공기관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장애인의 단말기 접근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 고려했어야 했다. 문제 제기가 나오고 나서야 땜질 방식을 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간 영역에도 장애인 접근성 제공”
현행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웹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앱(애플리케이션)과 같은 모바일 응용 소프트웨어 등은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여전히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정부가 최근 개정한 국가정보화기본법은 국가기관 등이 장애인·고령자 등이 웹사이트와 이동통신단말장치에 설치되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올 6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다만 개정된 국가정보화기본법은 정부와 공공기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대다수의 앱을 내놓는 민간기업은 규제하지 못한다. 이에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인 최혜영 의원은 지난 8월 민간 영역에도 무인단말기와 응용 소프트웨어 이용에서 장애인의 접근성 및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 조항을 규정한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척수장애를 가진 최 의원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국회 소통관 앞에 있는 커피 가게에도 키오스크가 있지만, 터치 화면 높이가 휠체어를 타는 나와 맞지 않아 이용하기 쉽지 않다. 무인단말기 대부분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제작·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무인단말기가 오히려 장애인에게는 불편을 가중하고, 심지어 사회적 불평등까지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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