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이 전차와 장갑차에 의존했다면, 21세기 지상군에서 ‘발’ 역할을 맡는 존재는 헬기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 UH-1 수송헬기를 도입한 이래 다양한 종류의 헬기를 운용중이다. 이를 이용해 대북 침투 등을 실시하는 특수작전과 산악 지형에 병력을 투입하는 공중강습작전도 중요성이 높아진 상태다.
하지만 육군의 헬기 전력 확보 계획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노후화가 심해지면서 UH-1H는 지난 7월 퇴역했다. CH-47D 성능개량은 13년째 착수조차 못한 상태다. UH-60 성능개량도 기존 방침에서 선회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육군 헬기 전력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CH-47 성능개량 백지화…원점 재검토 수순
육군이 운용중인 CH-47D ‘치누크’ 수송헬기 성능개량은 오랫동안 논란이 그치지 않았던 사업이다. 2007년 소요결정이 내려진 이후 실시된 선행연구만 4차례. 뚜렷한 결정 없이 연구와 조사가 반복되는 동안 CH-47D의 가동률은 추락했고, 노후화는 심각해졌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에 따르면, 국방기술품질원은 지난 9월 CH-47D 성능개량 4차 선행연구에서 “국외 성능개량보다 동일 장비 신규구매가 더 저렴하므로 사업 재판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능개량에는 1조3523억원이 소요되지만 새로 구매하게 되면 1조2209억원이 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백지화를 요구한 셈이다.
이같은 결과는 부품조달과 관련이 있다는 평가다. 성능개량을 하면 기존 기체에서 부품을 재활용하거나 신품으로 교체한다. 재생에 실패할 때 사용할 예비부품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문제는 기체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만 쓰였던 부품이 전체의 10~15%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미군이 대량의 재고를 갖고 있어서 구매할 수 있었지만, 미 육군도 CH-47F를 도입하면서 CH-47D 부품 단종이 잇따르고 있다.
성능개량도 단순하게 부품을 바꾸는 수준이 아닌, 모듈이나 케이블까지 전면 교체하는 방식이다. 개량 범위는 넓은데 부품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용이 상승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방사청이 올해 CH-47D 성능개량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측과 협의한 과정에는 기체 노후화와 부품 단종 등에 대한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방사청은 지난 4월 미국 정부로부터 가격 및 가용성자료(P&A)를 받았다. 자료에는 “성능개량 과정에서 재생품 결함과 재작업 소요가 발생, 예비품 확보를 위한 추가비용이 필요하다”며 “성능개량이 신규구매보다 고가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방사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올해 초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대외군사판매(FMS) 방식으로 활용하면 성능개량 비용절감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받았는데, 몇 달 만에 의견이 바뀐 것이다.
방사청은 4~5월 주한 미 합동군사업무단(JUSMAG-K)과 회의를 갖고 “이런 식이면 사업 못한다”며 비용절감방안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JUSMAG-K는 “한국 입장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고 조율하겠다”며 한국측이 CH-47D 재생대상품목의 세부 이력을 제공해달라고 답했다.
미국에서 회답이 온 것은 5월 말. 미국은 “재생대상품목(로터, 연료통, 트랜스미션) 중 트랜스미션만 재생 가능하다. 작업실패 대비 예비품 확보와 재생작업, 기술지원비로 1397억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며 “미국 표준과 다른 한국형 무전기 장착에 101억원이 소요되고, 한국형 임무장비(KVMF)는 장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방사청은 6월 말 국방부, 합참, 육군과 협의를 거쳐 재생범위에서 제외된 로터와 연료통을 포함한 성능개량비와 대안 제시를 미국측에 요구했다. 미국측은 7월 초 “재성범위에 관계없이 작업 관련해 추가비용이 필요하며, 기존 기체 노후화에 따라 재생품과 신형 장비간 호환성, 불일치 문제 증가가 예상된다”고 회신했다.
이에 방사청은 올해 말까지 기존 소요를 삭제한 뒤 내년에 획득방안을 재검토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CH-47D 성능개량은 우리나라 무기 사업의 고질적 문제인 ‘성능개량 후순위, 의사결정 번복, 사업기간 장기화’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국외구매→기술협력생산→사업범위 조정→국외 성능개량→신규구매로 사업방식이 변경되는 진통을 거듭한 결과 대북 억제력의 핵심인 침투부대와 공중강습부대 기동력은 떨어지게 됐다. 공군이 운용하는 CH-47D의 올 상반기 가동률은 41%. 육군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예산도 8278억원에서 1조2000억~1조3000억원 안팎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전력화시기도 당초 계획보다 최소 6개월 이상 지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하반기에 구매의향서를 미국에 보내도 2020년대 중반에 도입이 가능하다.
성능개량이나 신규도입 없이 CH-47D를 운용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부품 공급은 어려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성능개량 사업에 착수한 직후에는 의사결정이 번복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종 부품은 증가하고 비용도 상승했다.
그 사이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은 CH-47D 사용을 중단하고 신형인 CH-47F를 선택했다. CH-47D를 쓰는 유일한 국가가 된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미국의 의중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업 장기화와 의사결정 번복이 육군 전력 저하와 비용 증가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블랙호크보다 비싼 수리온 도입?
우리 군이 130여대를 운용중인 UH-60 ‘블랙호크’ 수송헬기 성능개량사업도 의사결정 번복과 사업 지연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이 국방부와 방사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6월 군 당국은 UH-60 성능개량 소요결정(특수작전용 36대, 일반용 103대)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5월 일반용 103대를 국산 수리온 개량형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UH-60 성능개량과 수리온 대체라는 두 가지 안이 나온 셈이다.
비용 측면에서는 UH-60 성능개량이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실시한 분석 결과 수리온 신규 도입 시 사업비는 1조1000억~3조원 더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KIDA 연구결과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지난 3~7월 산업연구원이 실시한 분석에서도 수리온 신규 도입 시 최대 3조원이 추가 소요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수리온은 산업파급효과에서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결과는 UH-60과 수리온의 차이에 기인한다. UH-1H를 대체하고자 개발된 수리온은 UH-60보다 작게 설계됐다. 그 결과 수리온 비행 가능 시간은 UH-60의 84%, 비행 거리는 83% 수준이다.
무장 병력도 UH-60은 11명, 수리온은 9명이 탑승한다. UH-60 성능개량 대신 수리온을 도입하면 기존보다 31대 많은 134대가 필요한 이유다. “군 작전개념도 바꿔야 하는데 비싼 수리온을 구매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나오는 대목이다.
UH-60 성능개량과 수리온 도입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미군이 UH-1을 60년 넘게 쓴 것처럼 UH-60도 30~40년은 더 쓸 수 있다. 제작사인 록히드마틴에서도 부품공급망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어 30년 동안 부품문제가 발생해도 대처 가능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국내 헬기산업 발전과 기술 축적 등의 중요성도 고려해야 한다”며 다른 의견을 냈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와 방사청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다. 지난달부터 ‘헬기 전력 발전방향 TF’를 운영중인 국방부는 다음달까지 중형기동헬기 전력 중장기 발전방안을 수립, UH-60 성능개량 사업 방식을 결정할 예정이다.
내부적으로는 특수작전형 34대 성능개량은 예정대로 진행하되 일반형 103대는 성능개량없이 2040년까지 쓰고, 2040년 이후에는 차세대 고기동헬기로 대체하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구상중인 것으로 알려진 차세대 고기동헬기는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직은 없다.
다만 산업연구원이 수행한 분석에 포함된 ‘수리온 혁신모델’과 연관이 있지 않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 모델은 엔진 부품 24종을 국산화하고 기어박스와 항공전자장비 등을 개발하는 방식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륙중량이 늘어나 UH-60을 1:1로 대체할 수 있다는 평가다. 산업파급효과는 크지만, 연구개발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은 불확실하다.
UH-60과 CH-47D 성능개량을 둘러싼 논란은 육군 항공전력 증강 사업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일선에서 운용중인 헬기는 노후화로 퇴역하거나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전력공백 우려가 높아졌으나, 이를 대체할 사업은 표류해왔다. 헬기 전력 발전에 대한 체계적인 중장기 계획이 요구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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