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상상하지 못할 괴로움…일상에서 이름 쓰는 것조차 보장 못 받아”
여성·시민단체, ‘피해자 인권 보호’ 긴급조치 촉구
박원순 지지자들도 “2차 가해 중단” 요청
법세련, “피해자 손편지 공개는 인권침해”…인권위에 진정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 피해자 A씨를 대리하는 여성·시민단체들이 최근 온라인상에서 A씨 실명 공개 등의 2차 가해가 잇따라 발생하자 정부에 A씨의 인권 보장을 위한 긴급조치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공동행동)은 28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 서울경찰청, 여성가족부에 A씨 정보 유출·유포 사건에 대한 신속하고 엄정한 조치를 촉구했다.
이들은 최근 A씨의 실명 등이 외부로 공개된 것과 관련해 “우리 법이 보장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동시에 피해자의 일상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A씨 실명을 공개한 사람에 대한 구속 수사와 2차 가해자에 대한 서울시 차원의 징계, 여가부의 적극적 대응 등의 조치를 요구해 온 공동행동은 “서울시와 여가부, 경찰청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이 사건은 수사를 할 때도 가명으로 진행해 (A씨의) 주변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면서 “피해자의 실명이 밝혀지면서 주변에서도 알게 되는 등 피해자가 앞으로 돌아갈 일상이 없어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A씨 가족은 A씨의 실명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이후 지인으로부터 A씨가 피해자가 맞는지를 묻는 전화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A씨 측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A씨가 박 전 시장에게 쓴 손편지 사진을 실명을 지우지 않은 채 수 분간 게시한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지난 24일 고소했다. 성폭력처벌법 제24조는 피해자의 신원과 사생활이 외부로 공개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공동행동은 이번 사건에 대해 “(박 전 시장의) 위력성폭력을 부정하려는 자에 의해 기획되고, 업무상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자에 의해 유출됐다”고 주장했다.
A씨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가 최근 페이스북에 공개한 A씨의 입장문에서 A씨는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돌아갈 일상에서 제 이름을 쓰는 것조차 보장받지 못하게 됐다”며 “인터넷에 제 이름이 공개된 것은 저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괴로움”이라고 호소했다.
A씨는 “인터넷에 제 이름을 공개한 것은 박 전 시장 지지자들이 저를 특정해 협박하는 것이다. ‘너의 존재를 알고 있다, 언제든 너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고 마음먹으면 찾아와 공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며 “저의 신변, 신상 관련 우리나라 법을 믿고 가명으로 조사받고 있는데, 그런 법을 무시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행위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해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지난 25일 사과문을 게시하고 “당일 자료를 올릴 때 이름을 미처 가리지 못한 채 의도치 않게 노출이 됐다”면서 “게시 직후 게시자료를 확인하던 중 그걸 발견하고는 즉시 ‘나만 보기’로 전환했다”고 해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2차 가해를 목적으로 실명을 공개하고자 했다면 게시 즉시 ‘나만 보기’로 전환하거나 실명을 가리는 작업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며 “민경국 전 서울시 인사기획비서관의 관련 자료 공개를 보고 공유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민 전 비서관은 지난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손편지 3장을 A씨의 이름을 지운 채 공개했다.
공동행동은 김 교수 등의 손편지 게시 행위부터가 2차 가해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위력성폭력을 부정하고자 하는 자들은 ‘심기 보좌’를 요구받았던 A씨의 업무 시 기록들을 피해자에 대한 공격으로써 유출·유포하며, 이것이 위력성폭력을 부정할 수 있는 자료라고 주장한다”면서 “그들이 해당 자료를 확보하고 선별해 맥락을 삭제한 채 게재 및 유포한 행위는 위력성폭력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A씨의 실명이 온라인상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A씨 측은 지난 10월7일 네이버 블로그 등에 A씨의 실명을 공개한 성명불상자를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김 변호사는 “피의자는 서울시청 관계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한 바, 피의자가 서울시청 내 누구를 통해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피해자의 실명 이름 및 피해자 직장명 정보를 제공받았는지도 조사돼야 할 것”이라며 “법에 의해 가명 조사를 받고 있는 피해자의 실명과 소속기관을 피해자 의사에 반해 공개하는 행위는 성폭력 피해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격이자,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야만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박 전 시장에 대한 A씨의 고소 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A씨의 신상정보를 찾겠다는 일부 네티즌들의 움직임이 이어졌으며, 명예훼손·모욕성 게시글도 잇따라 게시돼 경찰 수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A씨에 대한 2차 가해가 끊이질 않자, 박 전 시장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2차 가해를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원순을 지지했고 피해자 2차 가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A씨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을 요청하는 온라인 서명을 받고 있다. 2018년 박 전 시장의 선거 캠프에서 일했다는 이들은 “살아생전 고인의 정책과 정치 활동을 지지했다”며 “같은 이유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서명운동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이 동의 서명을 받고 있는 입장문에는 2차 가해 참여·동조자들에게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중단 △피해자가 작성했던 자료를 무단으로 편집하고, 유포하는 일 즉시 중단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서명운동은 오는 31일까지 진행된다.
이날 공동행동은 A씨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서울시와 여가부, 경찰에 긴급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서울시에 A씨 실명 등을 유출·유포하는 행위에 대한 즉각 고발조치 및 유출자 징계를 요구하고, 경찰에는 A씨 실명 유출·유포 사건에 대해서는 추가 유출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신속하게 구속 수사할 것을 요청했다. 여가부에는 ‘서울시에 대한 2차 피해 현장점검’을 실시할 것을 촉구한 공동행동은 “여가부는 성폭력이 발생한 현장, 특히 공공부문에 대해서 특별점검의 책무가 있고 지방자치단체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의해 2차 피해 예방의 의무가 있다”면서 “지금이 바로 법이 명시한 위급한 피해자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에 대한 지자체와 여가부의 역할을 발동해야 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이러한 요청 사항을 담은 서한을 각 기관에 제출했다.
한편 시민단체 법치주의바로세우기행동연대(법세련)는 이날 “김 교수와 민 전 비서관이 A씨의 동의 없이 손편지를 공개한 행위는 인권침해”라며 인권위에 김 교수 등에게 인권교육을 받을 것을 권고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법세련은 “피해자의 손편지는 업무상 공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사에 반해 공개 당하지 않을 권리가 내포된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이라며 “따라서 손편지 비공개는 사생활 비밀로 보호받을 권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