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개 쌀알 사진 찍어 프로그램 등록
가로세로 길이·평균 크기 한번에 계측
자로 일일이 재던 연구사 노동력 절감
품종 하나에 특성조사 항목 50∼70개
형태·색채 분석 기술까지 연내 구축 땐
평균 376분 걸리던 조사시간 절반 단축
추수 전 논 키다리병·벼쓰러짐 조사도
드론 촬영 후 영상 판독 2021년 시범운영
“다른 병해도 분석 가능하게 고도화”
지난해 말 경북 김천 국립종자원에서 작은 시연회가 열렸다. 연구사가 벼 한 이삭을 훑어 나온 수십 개의 낟알을 검은 벨벳 천 위에 흩어놓고 기역자 자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자체 개발한 영상분석기술 프로그램에 올리니 사진이 검은 바탕에 흰색 쌀알로 이진화됐다. 이어 쌀알들이 나란히 정렬하며 알마다 가로·세로 길이가 함께 표시됐다. 엑셀 파일로 저장하자 평균 크기가 자동으로 계산됐다. 사진으로 간단하게 해당 품종에서 생산된 작물의 평균 특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 속속 등장하는 요즘,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종자산업계에서는 작업 과정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혁신으로 주목받고 있다.
품종 특성조사는 종자산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전 품종과 조금이라도 다른 특성이 나타나야 신품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까다롭고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간단치가 않다. 한 품종에서만도 잎, 줄기, 꽃, 열매 등의 크기, 모양, 색깔 등 여러 가지 형질을 조사해야 한다. 조사항목 수가 장미는 54개, 고추는 47개 등 보통 50∼70개에 달한다. 조사 과정은 순수한 인력노동이다. 연구사가 자와 색상표를 들고 눈으로 조사한다.
10개 정도 샘플을 채취해 조사하기 때문에 한 품종당 평균 376분이 소요된다. 연간 출원품종 건수가 700건이 넘으니 상당한 노동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정확성을 요구하다 보니 계측형질(길이, 휘어짐)을 조사하는 데 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계측형질은 전체 조사 형질의 20%가량이지만 소요시간은 전체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종자원은 품종 특성조사 과정을 디지털화하기 위해 한국전자기술연구원과 공동으로 영상분석기술을 적용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가칭 ‘KR이미지’다. 미국에서 개발된 이미지J 프로그램이 있지만 몇 가지 작물의 길이만 측정할 수 있는 데다 개체를 반듯이 정렬해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노동력 절감 효과가 크지 않았다.
종자원 개발 프로그램은 식량 작물, 채소, 화훼 등의 계측형질을 사진을 통해 대부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됐다. 벼처럼 알이 작은 작물은 물론 고추처럼 휘어진 작물의 길이를 재는 것도 가능하다. 종자원은 영상분석이 효율적인 작물 11개를 선정해 지난해부터 특성조사에 투입했다. 효과 분석 결과 직접 조사방법과 비교해 30∼50% 시간이 단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도는 사람이 재는 것과 동일했다.
올해는 형태와 색채에 대한 영상분석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형태 분석을 위한 기본모듈개발이 완료됐고, 정확한 색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표준광원장치 개발도 거의 마무리됐다.
2019년 2품종 이상 출원된 작물만 58건, 총 조사항목 수 2614개였다. 기존방법으로 조사할 경우 총 2만1815분이 소요되지만 계측형질 조사를 영상분석으로 대체하면 1만6044분이 걸려 26%가 단축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계측·형태·색채 형질까지 영상분석으로 가능해질 경우 특성조사 소요시간은 1만796분으로 51% 단축될 전망이다.
종자원은 다음 달 농촌진흥청과 육종기업 등 50곳을 대상으로 교육한 뒤 프로그램 시범사용을 진행해 보완점을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또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국제식물신품종보호연맹 회의에서 시연하고 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소스를 공개할 계획이다.
한 연구사는 “신품종 출원은 매년 증가하는 데 비해 인력이 부족해 심사 품질의 저하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며 “영상분석기술이 도입돼 심사 시간과 노동력을 절감하고 정확성을 높일 수 있어 육종기관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품종심사 외에 우수한 종자를 보급하고 관리하는 일도 종자원의 주요 업무다. 보급 종자를 수확하기 전 병해충이 없는지, 다른 품종이 섞이지 않았는지 등을 조사하는데 이 또한 영상분석기술로 대체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개발 중이다.
지금까지는 종자 검사원들이 농가를 방문해 직접 걸어 다니며 병주가 있는지 살피고 도복(쓰러짐) 비율을 조사했지만, 영상분석기술을 활용하면 드론으로 사진을 찍어 간단하게 조사할 수 있다.
지난해 키다리병과 도복률 조사가 가능한 단계까지 개발됐다. 영상분석은 데이터가 많을수록 정확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종자원은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에서도 사진을 찍어 수집하고 있다. 지난해 축적한 데이터를 토대로 올해 시범운영을 하며, 다른 병해까지 조사를 확대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고도화할 계획이다.
안형근 종자원 품종보호과장은 “종자원의 주요 업무인 품종 특성조사와 보급종 포장검사 업무에 영상분석기술을 도입해 심사의 정밀성을 높이고 업무 효율화를 도모하고 있다”며 “한국의 영상분석기술이 전 세계 종자산업 혁신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김천=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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