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아동 조기발견, 초동대응, 재학대 방지책 등 망라
정인이 사건에서 경찰청 대책 제대로 적용된 것 ‘0’
제도 개선 지적 앞서 경찰청 대책이라도 이행돼야
“사소한 아동학대 징후라도 조기에 발견, 전문기관을 통해 보호, 지원하겠다”
정인이의 양부모가 학대를 시작하기 2개월 전인 지난해 3월 경찰청이 아동학대 예방을 위해 내놓은 대책 중 한 대목이다. 경찰청은 이 대책을 통해 학대받는 아동을 조기에 발견하고 초동 대응을 강화해 아동에 대한 ‘재학대’를 방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경찰청의 이 계획은 정인이 사건에서는 한 대목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신고에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수사의뢰도 번번이 묵살됐다. 특히 마지막 기회였던 지난해 9월 신고 때는 전문가인 의사가 직접 신고를 했음에도 경찰은 다른 의사의 말을 들은 뒤 내사 종결했다. 경찰이 제도적 보완장치만 강조할 게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대책에 따른 조치만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7일 경찰에 따르면 경찰청은 지난해 3월 ‘아동학대 예방 및 대응을 위한 공동체 치안 체계 구축’이란 이름으로 아동학대 대책을 만들었다. 발견이 쉽지 않고 세밀한 접근이 필요한 아동학대 대응을 위해 경찰청과 유관기관, 전문가와 함께 체계적인 대응전략을 수립하겠다는 취지였다. 아동학대 특성상 부모가 가해자(79.6%)인 경우가 많아 경찰청은 피해아동 보호의 관점에서 “세밀한 접근 및 전문적인 대처가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이 대책에는 학대받는 아동을 조기발견하고 초동대응 및 수사를 강화하는 방안, 재학대 방지 및 아동 보호지원 방안이 망라됐다. 하지만 정인이 사건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학대아동 조기발견 → 정인이 사건에서 적용 안 됨
경찰청은 우선 2017년 수정됐던 ‘아동학대 체크리스트’를 개선해 학대 우려가 있을 경우 철저히 수사하고, 경미한 사안이라도 위험여부를 신속히 인지,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연계하겠다고 했다. 아동학대 특수성(신고이력, 가해자 위험요인)을 반영하고 위험성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항목을 만들어 만에 하나 놓칠 수 있는 아동학대 사건까지 잡아내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경찰은 지난해 5월26일 멍 자국 등을 이유로 한 어린이집 원장의 1차 신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수사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홀트아동복지원의 입양 상담 기록지 등에 기재된 내용을 근거로 몽고반점, 아토피 상흔 등에 불과하다며 6월 내사종결한 것이다. 당시 이 체크리스트가 개발 중이었다고 하더라도 현행 체크리스트가 허술한 것을 경찰관들이 인지했던 만큼 적극 대응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1차 신고를 받고 조사에 나선 경찰은 오히려 아동학대 신고를 당한 양부모를 위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시민감시망을 활용해 아동학대 발견율을 높이자’는 지침도 무시됐다. 이 지침은 지난해 3월부터 전국에 하달돼 운영됐다. 아동학대 위험 징후를 지역사회나 시민이 신고하면 경찰이 적극적으로 해당 가정을 방문해 아동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게 지침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지침 역시 정인이 사건 때는 무용지물이었다. 양모의 지인이 지난해 7월 정인이가 차량에 3시간 동안 방치되고 있다며 아동보호전문기관에 학대의심 신고를 해 수사의뢰됐지만, 경찰은 아동학대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불기소 송치 결정을 했다.
특히 당시 정인이의 쇄골골절이 의심됐는데도 진료 의사의 말만 믿고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대책 내 기재된 경찰 지침에 따르면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나 신체 상처 발견’이 가정 내 아동학대 징후로 명시돼 있다.
◆초동대응 및 수사역량 강화 → 정인이 사건에서 적용 안 됨
아동보호전문기관과 협업해 초동대응을 강화하겠다는 경찰의 약속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정인이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9월 3차 신고 당시마저 경찰은 정인이를 위한 보호에 ‘무책임’했다. 당시 오랜만에 등원한 정인이의 체중이 4개월 새 1kg 줄어있고, 혼자 걷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어린이집 교사가 소아과에 데려갔고, 학대를 의심한 소아과 의사가 경찰에 신고했다. 이 의사는 당시 “15개월 아기한테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자포자기랄까,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청의 대책에도 ‘의료인의 학대 의심 신고가 들어올 경우 현장 동행출동을 강화’한다는 점이 명시돼 있다. 아울러 경찰청은 당시 아동학대 전문수사과정을 개설해 ‘아동학대 사례’ 등을 일선 경찰관을 상대로 교육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조사팀과 방문 조사에 나서고도 양모가 자주 방문하던 병원에서 구내염 진료를 받고 오는 데 그쳤다. 분리조치도 실시하지 않아 정인이는 다시 지옥같은 양부모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로부터 20일 뒤 정인이는 결국 숨졌다.
◆재학대 방지 → 정인이 사건에서 적용 안 됨
한 번 학대 받은 아동에 대해 재학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경찰의 대책도 정인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경찰청은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보유, 관리 중인 정보를 바탕으로 재학대를 방지하겠다고 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정보 공유를 통해 주기적으로 학대 피해아동의 거주지를 방문, 학대 위기에 놓인 아동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인이 사건에서 경찰은 지속적으로 신고가 들어온 가정임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정인이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교사나 원장, 시민들의 신고가 들어왔을 때만 정인이를 확인하는 데 그쳤고, 그마저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경찰청은 이 대책을 마련하면서 집에서 떠든다는 이유로 찬물 욕조에 피해아동을 1시간 동안 들어가게 해 사망케 한 경기 여주의 계모사건(2020년 1월)을 아동학대 사건의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이 사건은 친모가 아닌 계모가 학대를 자행하고,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가 들어가는 등 정인이 사건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이런 사례를 들어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종합대책을 추진하겠다고 경찰청이 약속했지만 경찰은 정인이 사건에서 학대아동 조기발견, 초동대응, 재학대 방지 등 모든 단계에서 정인이 학대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현장 출입권 등 현장조치를 위한 추가 입법 등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지만 이 사건에서 경찰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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