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청교도가 신대륙에 이주해 건국한 기독교 나라다. 중국과의 교역 이후 미 상인들이 전한 중국 이야기는 이들의 선교 횃불에 불을 댕겼다. 유구한 역사, 위대한 문명과 세계 최대 경제력의 명성과 달리 중국은 ‘병든 나라(sick)’로 전해졌다. 중국인들은 중앙집권체제와 봉건사회에서 허덕였고 결코 창조적이고 강하며 신비롭지 않았다. 교역체계의 운영은 비상식적이었다. 종교의 부존 사실도 중국을 미개해 보이게 했다.
중국에 간 미국인은 선교사와 상인 등 두 부류였다. 1807년에 미국의 첫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도착한 후 27년 동안 개종된 중국인은 10명에 불과했다. 3억의 중국인 개종에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중국인을 장기간 교육하면서 계몽하고 전공을 익히게 하는 게 고안됐다.
새로운 전략에 아델 필드는 남성 중심의 선교사회에 여성의 기여부분을 주장했다. 설득 끝에 그는 1872년 미국의 첫 중국 여성선교사가 되었다. 중국의 부녀자를 통해 중국 가정에 미국의 가치와 문명을 전파할 수 있다는 논리가 통했다.
중국 학생의 미국 유학 사업도 1872년 시작됐다. 20년 동안 연 30명의 규모였다. 중국은 자강을 위해 이들의 미 육사와 해사 입학을 요구했다. 1877년 미 정부의 불허 결정으로 서태후는 이를 1881년에 종결한다.
선교의 재정은 미 교회의 광풍적인 ‘모금운동’(pennies for China)으로 대부분 충족되었다. 이 광풍은 중국국민당 정부가 1949년 대만에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국의 기독교화에 대한 미국인의 강한 염원은 국민당 정권의 유지비용을 충당시킬 정도였다. 가령, 중국 최고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의 세례 소식만으로도 한 주일(主日)에 수백만 달러를 걷어갔다.
미국의 중국 동정심은 오늘날 미국이 중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환시키려는 사상적 근간이다. 1950년대 이를 응용해 수립한 “평화연변(peaceful evolution)” 전략의 모태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중국에 대외공포증(xenophobia)이 존재하고 중국이 통 큰 개방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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