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비에 젖는 풍경·숲의 향기···풀빛 더 짙어지겠지 / 신라 최치원 선생이 홍수방지위해 조성한 인공숲 / 두 나무 얽힌 ‘천년약속 사랑나무’ 신기 / 남계서원·청계서원 고즈넉
봄비 내린다. 겨우내 쌓인 수북한 낙엽 위로 추적추적. 오랜 시간 동안 제멋대로 휘어지며 자란 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따라 전해지는 진한 숲의 향기들. 신비로운 ‘천년의 숲’ 상림이 달콤한 봄비 맞고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이 비 그치면 서러운 풀빛이 더 짙어 오겠지.
#봄비 맞으며 천년의 숲 상림 걸어볼까
경남 함양 상림공원은 ‘천연기념물’이다. 아주 오랜 역사가 담겨 있어서다. 무려 1100여 년 전인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로 부임한 신라 최고의 문필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위천이 범람하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아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이다. 인근 가야산 나무들을 옮겨 심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120여종의 온대 낙엽활엽수 2만여 그루가 자라는 무성한 숲이 됐다. 원래 숲길은 4km에 달했지만 중간 부분이 훼손돼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 상림은 둑을 따라 길이 1.6km, 폭 80∼200m가량의 숲으로 남아있다.
투닥투닥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봄비 덕분에 신비로운 숲은 운치를 더한다. 숲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낙엽이 수북하고 나무들은 가지가 휘어지며 얽히고설켜 한몸이 된 풍경이 숲이 지나온 시간을 들려준다. ‘천년약속 사랑나무’ 앞에 섰다. 보통 두 나무가 얽혀 한몸이 되는 연리지는 뿌리는 다르지만 수종은 같다. 그런데 이 사랑나무는 자작나무과인 개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 한몸으로 붙어버렸다. 수종이 다른 연리지는 아주 드물기에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지고 덕분에 나무 앞에서 연인이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운치 있는 2층 누각 함화루를 거쳐 함양 척화비를 지나면 천년교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고운 선생이 제방을 만들 때 건너편에 살던 총각이 함양성 안에 사는 처녀를 사랑해 매일 밤 시냇물을 건너왔단다. 이를 알게 된 선생은 돌다리를 놓았고 사람들은 ‘오작노디(오작 징검다리)’라고 불렀다. 세월이 지나 다리는 사라지고 이런 얘기만 전해졌는데, 함양군에서 2013년 운치 있는 아치형 천년교로 부활시켰다. 다리 위에 서니 위천과 상림, 물안개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몽환적이다.
숲은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이지만 노랗게 피어난 산수유 덕분에 쓸쓸하지만은 않다. 숲을 걷다보면 사운정, 초선정, 화수정 등 정자와 최치원 신도비, 이은리 석불, 다볕당 등 많은 문화재들을 만난다. 이은리 석불은 1950년 함양군 이은리 냇가 부근에서 출토된 1.8m의 석조여래좌상으로 두 팔목이 떨어져 나가 구멍만 남아있다. 최치원 선생의 재미있는 설화도 전해진다. 효성이 지극한 최치원 선생은 어느 날 어머니가 상림에서 뱀을 만나 너무 놀랐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상림으로 달려갔다. 그는 “모든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말라”고 외쳤고 그 이후에 뱀, 지네 등의 미물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상림은 사계절 아름다운 곳으로 함양을 떠난 이들은 동네 친구보다 상림을 더 그리워한단다. 여름에는 화려한 연꽃이 가득 피고 초가을에는 빨간 꽃무릇 군락이 천년의 나무와 어우러진다. 가지마다 눈꽃이 열리는 겨울 설경은 상림을 더욱 눈부시게 한다.
#고즈넉한 서원 마루에도 봄 내리네
아름다운 숲을 남긴 고운 선생에게 감사하며 봄비 맞으며 산책하기 좋은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으로 향한다. ‘좌안동·우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학문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로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함양을 대표하는 인물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일두 정여창.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위패를 모신 곳이 남계서원이다.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으로, 서원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나촌으로 터를 옮겼다가, 광해 4년(1612)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됐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아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소수서원은 건물이 일정한 형식 없이 배치됐지만, 남계서원은 제향공간을 뒤쪽에 배치하고 강학공간을 앞쪽에 둔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초기 배치 형식을 보여준다.
풍영루를 지나 유생들이 글공부를 하던 명성당 툇마루에 앉았다. 유생들이 거처하던 보인재와 양정재로 둘러싸인 서원은 고요해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오랫동안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다 사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본다. 내삼문 앞에 서면 고즈넉한 서원의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계서원에서 차로 5분 거리인 개평한옥마을에는 정여창 생가인 함양일두고택을 만날 수 있다. 풍천노씨대종가, 함양개평리하동정씨고가, 함양오담고택 등 유서 깊은 고택들이 있는 한옥마을로, 드라마 ‘토지’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남계서원 바로 왼쪽에 청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을 기리는 서원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그는 1495년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치다 연산 4년(1498) 무오사화 때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돼 희생됐다. 춘추관에서 역사의 기록·편찬을 담당하는 기사관으로 일한 그는 글이 뛰어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구경재,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잘 보존돼 머리를 식히며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특히 노령의 운치있는 소나무가 서원을 운치있게 꾸며주는 풍경이 아름답다.
함양은 산청, 합천, 거창과 함께 ‘한방 항노화 웰니스관광’으로 요즘 주목받는 곳이다. 특히 산삼이 유명하다. 지리산과 덕유산 자락에 들어앉은 함양은 오지로 통할 정도로 전체 면적 중 산지가 78%에 달하고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15곳이 있다. 토양에는 몸에 좋은 게르마늄이 다른 지역보다 3∼6배 많아 효능이 뛰어난 산삼이 잘 자란다. 오는 9월 함양산삼항노화엑스포가 상림공원 등에서 열릴 예정이며, 산삼주제관에서 심마니 풍습을 엿보고 2016년 채취된 100년 이상된 천종삼도 만날 수 있다.
함양=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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