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행성 불시착한 듯 1만8000년 세월 쌓인 경이로운 화산재 절벽/수월과 녹고 남매 슬픈 전설 깃듯 수월봉 낙조 장엄
얇게 차곡차곡 정성 들여 쌓아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 같다. 1만8000년 세월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수직절벽의 나이테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당대 최고의 솜씨 좋은 조각가도 이런 멋진 작품은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제주 수월봉 화산재 지층 앞에 서자 인간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진다.
#세월의 신비 가득한 화산재의 나이테
제주 한경면 노을해안로 수월봉 입구에는 전기자전거를 탄 젊은이들이 분주히 오간다. ‘엉알길’로 불리는 수월봉 해안절벽의 화산 지질 트레일을 따라가는 여행자들이다. 전체 길이는 2km 정도로 걸어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고 천천히 걸어봐야 제 맛을 알 수 있으니 전기자전거보다는 걷기를 추천한다. 수월봉 표지석이 우뚝 선 곳에서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물을 따라가는 여행이 시작된다.
양쪽으로 길이 나뉘는데, 동쪽 고산기상대 방면 절벽쪽 길은 계단으로 시작돼 걸어서만 갈 수 있다.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듯 비현실적인 풍경에 보는 순간 입이 쩍 벌어진다. 크레이프 케이크를 절반으로 잘랐을 때 드러나는 단면처럼 높이 77m 수직절벽은 마치 얇은 기왓장이나 돌판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 듯,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 장관이다. 오랜 세월 바람이 사포질을 하면서 지층의 나이테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풍경이 만들어졌을까. 화산 폭발로 땅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지상으로 뚫고 나올 때 물을 만나면서 폭발하는데, 이때 뿜어 나온 화산 분출물이 차곡차곡 낮고 넓게 쌓이면서 이런 지층이 형성됐다. 전문용어로 ‘수성화산체 응회환(tuff ring)’이라 부르는 화산재 지층은 단면을 보기 어렵지만 수월봉은 일부러 화산재 지층을 절단한 듯 단면이 잘 노출돼 ‘화산재 지층의 교과서’로 불린다. 성산일출봉도 비슷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수성화산체이지만 화구륜이 높고 경사가 가팔라 ‘응회구(tuff cone)’로 구분한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간 뒤 뒤돌아서 사진을 찍으면 햇빛을 잘 받아 파란 하늘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화산재 절벽이 기묘하게 어우러지는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자세히 보니 물결치는 모양의 가로줄무늬 곳곳에 검은 돌덩어리들이 무수히 박혀있다. 마치 진흙벽에 돌을 던져 꽃은 것 같은데 바로 화산탄이다. 지층은 바로 이 화산탄 때문에 휘어진 ‘탄낭구조(bomb sag)’를 띠고 있는데, 이는 수월봉의 화산활동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10여분 정도 걸어 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아주 작은 동굴을 만난다. 풀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맑은 물이 고여 있는 풍경이 아주 신비롭다.
화산재 절벽은 동쪽 ‘해녀의 집’까지 1km가량 더 이어지지만 길이 중간에 끊겨 갈 수 없다. 다시 돌아나가 수월봉 입구 교차로에서 노을해안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좁은 주차공간 옆에 해녀의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고산기상대 아래까지 화산재 지층이 이어진다. 탐방로가 따로 조성돼 있지 않아 그냥 해안을 따라 가야 하고 낙석 위험 때문에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 있다. 사실 이곳이 수월봉의 하이라이트다. 검은모래 해변이 화산재 절벽을 따라 펼쳐진 풍경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화산재에 포함됐던 검은색 현무암과 소량의 석영 알갱이들이 억겁의 시간 동안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바닷가에 쌓이면서 마치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듯 착각에 빠지는 진귀한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수월봉 황홀한 낙조에 심쿵
수월봉 같은 지질명소 덕분에 제주도는 2010년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제주 상징인 한라산, 용암돔 산방산, 수성화산 활동 역사를 간직한 용머리해안, 주상절리가 만든 해안절경 중문주상절리대, 100만년 해양환경을 알려주는 서귀포층, 계곡·폭포 형성 과정이 담긴 천지연폭포, 해 뜨는 오름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 중 유일하게 탐방 가능한 만장굴, 생태계 보고인 선흘곶자왈, 섬 속의 섬 우도와 비양도, 교래 삼다수마을이 지질명소다.
이런 멋진 풍경과 달리 수월봉에는 수월과 녹고 남매의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진다. 엉앙길에서 만나는 화산재 절벽에서 솟아오르는 샘 ‘녹고물’에 얽힌 이야기다. 의좋게 살던 남매는 홀어머니가 몹쓸 병에 걸리자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집앞을 지나던 한 스님이 백 가지 약초를 먹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알려줬고 이에 남매는 이곳저곳을 헤매며 99가지 약초를 힘겹게 찾아냈다. 마지막 남은 약초는 절벽 중간쯤에 자라고 있었고 누나 수월이 녹고 손을 잡고 한발한발 내려가 약초를 캐 녹고에게 건네는 순간, 그만 손을 놓쳐 수월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녹고는 자책하며 절벽 위에서 떠나지 않고 한없이 울기만 했고 녹고가 죽은 뒤에도 그의 눈물이 샘물이 돼 지금도 흐른다는 전설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녹고물)로, 절벽을 녹고물오름이나 수월봉으로 부르게 됐단다.
실제 엉알길을 따라 가다보니 곳곳에서 절벽 틈으로 물이 줄줄 흐른다. 사실은 해안절벽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아래 진흙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암석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서쪽 엉앙길을 따라 걷는다. 절벽 틈에 피어난 꽃들이 진한 향기를 발산하고 검은 화산 암반을 끊임없이 때리는 푸른 파도를 즐기며 걷다보니 가슴이 시원해진다.
이제 수월봉 트레킹 중 최고로 멋진 순간을 맞이할 시간. 바로 수월봉 전망대의 낙조다. 수월봉 표지석에서 동쪽 오르막길을 따라 가면 녹고의 한을 위로하는 작은 정자 녹고대를 만나고 조금 더 오르면 고산기상대와 수월봉 전망대가 보인다.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섰다. 이미 많은 이들이 난간에 기대 감탄을 쏟아내며 낙조를 즐기고 있다. 지구로 떨어진 혜성처럼 붉게 타는 커다란 태양이 수월봉 앞바다와 차귀도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풍경은 환상적이다. 불덩어리가 서서히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수월봉 바다에 고요가 찾아온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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