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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으로 멈춰선 세상, 인류·환경에 대한 성찰

입력 : 2021-08-19 19:58:07 수정 : 2021-08-19 19:5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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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티스트 강이연 ‘앤트로포즈’

빔프로젝터가 만드는 아름다운 환영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조금씩 빨라져
인간들의 욕심이 부른 기후변화 암시
‘유한한 존재’ 망각한 인류에 대한 경종
‘무한(Infinite)’ 설치 전경

2차대전 이후, 이만큼 인간이 철학적 성찰을 해야 하는 시대가 또 있었을까. 세계는 전염병이 돌출하면서 공통의 문제를 맞닥뜨렸다. 모두가 전염병 공포 속에 살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활했다. 동시에 넘쳐나는 유동성 탓에 근래 유례가 없는 풍요로움이 신기루처럼 목격된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함, 무한해 보이는 자본주의적 팽창이 동시에 펼쳐지는 이 시대는 실존주의 철학이 탄생했던 시대의 데자뷔처럼 다가온다. 미디어아티스트 강이연 작가 신작은 이 같은 동시대 특징을 꿰뚫은 성찰이 담겨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강이연:앤트로포즈(Anthropause)’에서 강 작가 신작 ‘무한(Infinite)’과 ‘유한(Finite)’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은 ‘무한’. 천장 한가운데, 빔프로젝터를 품고 있는 화려한 알루미늄 스틸 소재 조각 작품이 360도 회전하며 공간 전체를 비추고 있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이 알루미늄 스틸에 반사돼 벽면에는 환상적인 그림자가 생긴다.

마치 보석이 반사한 빛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환영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관람객이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조금씩 빨라지고 있는 이 속도는 최근 150년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량을 반영한 것. 결국 관람객은 인류, 관람객을 둘러싸는 환영은 환경을 은유한다. 영원히 똑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아름답게, 사계절이 돌아오고 아침과 밤이 돌아올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은 인류 행위 결과로 기후변화에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려는 시도다.

‘유한(Finite)’ 설치 전경. PKM갤러리 제공

이어 다음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유한’은 더 직접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 더없이 쾌청해 보이는 푸른 숲으로 바닥부터 벽면까지 공간 전체를 매핑했다가 이내 고층빌딩 숲과 전쟁음향으로 치닫는 속도감 있는 영상작품이다. 두 작품은 정반대 의미의 제목이 붙어 있고, 풀이방식도 대조적이지만 같은 메시지로 귀결되며 강한 인상을 준다.

전시 제목 ‘앤트로포즈’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 이후 만들어진 신조어로, 인류의 정지상태를 뜻한다. 한국보다는 영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해온 강 작가는 런던에서 팬데믹 시절을 겪으며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정지된 도시에서 그는 이번 세계적 멈춤의 시간이야말로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시간이 아니라 성찰의 시간, 사유의 시간이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드로잉 ‘finite.audiosystem(유한.오디오시스템)’

마침 전염병 바이러스는 변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끝이 보이는 듯했던 바이러스와의 싸움도 다시 현재진행형이다. 변이는 바이러스를 이긴 인간 승리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코로나19 발생과 인류의 정지상태도 한해를 넘겼지만 작가의 메시지는 더욱 시의적절해졌다.

이미 입소문을 타고 관람객들이 꾸준히 걸음 했다. 평일에도 갤러리 앞에는 예약된 시간에 맞춰 입장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하며 대기하고 있는 방문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컴퓨터 기술의 기교로 비주얼은 화려하나 개념은 빈곤한 미디어아트 작품들 사이에서 갈증이 깊어지고 있던 미술계에서는 ‘특히 반가운 작품’이라는 호평이 나오고 있다. 전시장 2층 별도 공간에서는 작가의 두 작품의 설계도 격인 연필 드로잉 작품들도 선보인다.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고 준비했을지 호기심이 생긴 관람객들에게는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다.

강이연 작가

갤러리 관계자는 “강 작가는 환경문제에도 천착해온 작가”라며 “작품이 가진 시각적 매력과 작품에 담겨 있는 개념과 의미가 잘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 모처럼 나온 것이어서 특히 호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21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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