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노벨상 수상… 11번째 장편소설
작고 평화로운 가상의 섬 ‘민게르’ 배경
엄격한 감염병 방역과 시민들 저항 그려
여성 주인공 내세워 사건 전반 설명 방식
페스트 창궐 당시 인간 영혼의 반응 서술
카뮈가 쓴 페스트는 정치소설… 차이점

작가 오르한 파무크가 페스트를 소재로 역사소설을 써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서양 여행가들이 쓴 회고록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 ‘오리엔탈리즘’을 읽은 뒤였다. 이들 책에는 이스탄불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시민들이 그다지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거나 터키인이나 무슬림, 아시아인들이 페스트에 대해 운명론자 같은 태도를 취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미 자신의 소설에 페스트를 다뤘을 정도로 감염병에 대해 수십년 연구해온 그가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읽어본 결과, 아시아인을 차별적으로 보는 동양주의나 운명주의는 사라지고 대신 방역의 어려움이나 방역과 격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페스트와 감염병이야말로 민족주의 부상과 제국 붕괴 이후 작은 국가의 탄생 등 여러 사회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보였다.
1894년에 시작된 제3차 페스트 감염병에 대해 쓰기로 한 그가 특히 주목하고 자주 읽었던 자료들은, 영국 의사들이 식민지인 인도 뭄바이와 홍콩에서 쓴 보고서들이었다. 영국 의사들은 보고서에서 영국에 있는 상관에게 마치 회고록을 쓰듯 당시 상황들을 써서 보냈다. 어디 어디에 갔고, 어디를 소각했으며, 사람들이 아주 무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등등.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무크가 수십년간 구상하고 취재한 뒤 5년간의 간난신고 끝에 새 장편 ‘페스트의 밤’(민음사·사진)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열한 번째 장편으로, 터키 출간 1년 만에 한국어판으로 나왔다. 작품은 미스터리한 죽음을 파헤쳐 가는 추리소설 형식으로 20세기 초 페스트 창궐을 그린 재난소설이면서도, 민족주의 부상과 제국의 몰락, 독립 국가의 탄생을 그린 정치사회 소설이다.
오스만제국 몰락기인 1901년, 동지중해에 위치한 인구 8만명의 작고 평화로운 가상의 섬 민게르에서 페스트가 퍼진다. 혼란에 휩싸인 섬에 제국 황실 화학자이자 방역 전문가인 본코프스키 파샤가 파견되지만, 그는 방역을 제대로 시행해보기도 전에 살해된다. 본코프스키 죽음 이후 의사인 누리가 아내이자 무라트 5세의 딸인 파키제 술탄과 함께 새 방역 전문가로 나선다. 하지만 방역 조치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 행정부 무능으로 방역은 실패하고, 술탄은 서구 열강 압력에 못 이겨 섬을 봉쇄한다. 엄격한 격리에 반발한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키고 섬은 제국으로부터 독립한다. 페스트에서 시작해 정부 대응과 시민들의 태도, 일상 변화 등 수많은 곡절을 거친 뒤에 제국이 몰락하고 민족주의 및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을, 소설은 다음처럼 상징적으로 묘파한다.
“이제 콜아아스는 발코니의 난간까지 다다랐다. ‘이스탄불로부터 전보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리기 시작하면 방역은 끝날 것이고, 질병은 잠잠해질 것이며, 우리 모두 안전해질 겁니다.’ 그는 진짜 정치인처럼 말했다. 그런 다음 광장을 향해 몸을 돌리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민게르 만세! 민게르인 만세! 민게르 민족 만세!’”

거장 파무크는 왜 페스트를 다룬 소설을 펴냈을까. 그의 소설들은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독자와 평단 모두 매료하는 것일까. 책을 번역한 이난아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전임 연구원이 우리나라 기자들 서면 질의를 취합해 지난 16일 파무크와 대표로 줌 인터뷰를 했다.
―가상의 민게르 섬이 소설의 배경인데요.
“저는 고립된 공간이라는 주제를 좋아합니다. 저의 소설 ‘눈’에서도 폭설이 내려 카르스라는 도시가 고립되죠. 고립된 곳에서는 역사가 빠르게 진행됩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200년 동안 진행된 혁명이, 민게르 섬에서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죠. 혹은 ‘눈’에서 도시가 고립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실 ‘페스트의 밤’은 어떤 면에서 소설 ‘눈’과 유사합니다.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은 고립된 공간이라는 점, 정치 소설이라는 것이지요.”
―감염병이 어떻게 제국의 붕괴나 국가의 탄생 등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요.
“소설은 한편에선 페스트 창궐 당시 인간 영혼의 반응,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은 오스만 제국 말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지요. 제 생각에 오스만 제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제국 내 슬라브 민족주의, 그리스 민족주의, 불가리아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 조지아 민족주의 등 수많은 민족주의가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켰지요.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화자를 작가 자신이 아닌 미나 민게를리로 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사건들을 요약하는 어떤 서술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1901년 민게르 섬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긴 파키제 술탄도, 21세기 이를 역사소설 형태로 쓴 민게를리도 모두 여성인데, 왜 여성입니까) 작가로서 결심을 한 게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작품에서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내부에서 모든 것을 보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할 소설을 쓸 예정입니다. 저는 중동 지역 남성입니다. 중동 남성들의 전형적이고 형편없는 사고들이 안타깝지만, 저에게도 그런 부분이 존재해요. 이런 제 모습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장자크 루소가 이런 말을 했지요. 자신의 어머니와 다투는 남자는 항상 부당하다고요. 페미니스트 비평가들과 싸우는 중동 남성들은 항상 부당합니다.”(웃음)
―카뮈의 ‘페스트’와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카뮈의 ‘페스트’를 2년 동안 컬럼비아대학 학생들에게 정치 소설로 읽히고 있습니다. 카뮈의 ‘페스트’는 페스트에 대한, 방역에 대한 사실주의 소설이 아닙니다. 카뮈가 쓴 것은 정치적 알레고리이고, 저의 소설 ‘페스트의 밤’은 페스트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실주의적인 팬데믹 소설입니다.”
1952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파무크는 스물세 살 때 돌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스탄불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자퇴했다. 1979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7년 후인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의 아들들’을 펴냈다. 그는 이 소설로 오르한 케말 소설상과 밀리예트 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후 소설 ‘고요한 집’(1983), ‘하얀 성’(1985), ‘눈’(2002), ‘순수박물관’(2008), ‘내 마음의 낯섦’(2014)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써냈다. 2006년 터키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수십개의 상을 수상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팬데믹에 전쟁의 비극까지 더해졌는데요.
“푸틴의 공격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주 원시적이며, 중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중세로의 회귀’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아주 유명한 글이 있지요. 어떤 의미에서 중세가 다시 도래했습니다.(어떤 지혜를 모아야 하나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소설가입니다. 정치적 문제에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단지 이러한 상황의 모순을 소설을 통해 보여줄 뿐입니다.”
열병 같은 스물세 살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소설가가 되리라고, 더구나 최고 권위의 노벨 문학상을 받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는 오르한 파무크. 알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이 또다시 폭풍처럼 그의 작가 인생을 휩쓸고 가지는 않을까. 한 번 일어나는 게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어렵지 않다는데.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갈급하게 궁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른 서울의 하늘은 말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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