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 들지만 번번이 흐지부지
정원 축소·업무비 삭감이 개혁?
낙하산 인사부터 뿌리 뽑아야
“공기업 개혁이야말로 공공부문의 군살을 빼고 민간부문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길입니다.”(이명박 대통령, 2009년 1월 신년 국정연설)
“공공기관 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했고, 일부 기관의 경우 부채비율이 500%에 육박했다. 파티는 끝났다.”(현오석 경제부총리, 2013년 11월14일 공공기관장 조찬간담회)
“공공기관의 비효율과 방만경영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추경호 경제부총리, 7월29일 공공기관운영회의)
기획재정부가 최근 ‘새정부 공공기관 혁신가이드라인’을 내놨다. 내년도 공공기관 정원을 줄이고, 올 하반기부터 경상경비와 업무추진비는 10% 이상 삭감하는 게 골자다. 새정부 초기 연례행사인 공공기관 개혁이 또다시 등장했다. 방만경영과 철밥통으로 인식되는 공공기관의 체질개선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고, 동시에 집권세력이라면 꼭 풀어야 할 국정과제라는 뜻이다.
정권마다 서슬 퍼런 집권 초기에 작심한 듯 공공기관에 메스를 들이댔지만 성적표는 낙제점이었다.
최근 세계일보가 한국전력공사·한국수력원자력 등 14개 재무위험 공공기관의 지난해 평균 부채비율을 조사해보니 270%를 넘고, 부채규모는 372조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기념품비·문화여가비 등으로 매년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씩 쓰고 있었다.
여러 정권에 걸친 숱한 개혁도 왜 이렇게 무용지물이었을까. 낙하산 기관장과 노조의 갈등, 알박기 인사, 민영화 논란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나는 낙하산으로 상징되는 공공기관 인사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선거의 논공행상 자리로 전락한 기관장이나 감사는 개혁의 선봉장이 아니라 장애물로 전락했다.
공공기관의 기득권자들은 낙하산 기관장의 약점을 등산길 초파리처럼 집요하게 공략한다. 노조는 취임식부터 막아서며 낙하산의 군기를 잡고, 여의도를 노리는 낙하산에게는 정치적 야심을 부추기며 제 편으로 포섭한다. 숱한 낙하산을 겪으며 축적된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공공기관들은 개혁의 칼을 피한다. 종국에는 낙하산과 윈윈할 수 있는 교묘한 타협점을 찾아내고, 정권 후반기로 가면서 끝내 원상회복을 쟁취한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평하게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고르라.”
조선시대 영조가 지금 인사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격인 ‘이조’에 내린 글이다.
이 글귀를 바탕으로 ‘낙하산 근절법’을 만들면 해결될까. 너무 순진한 소리다.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모인 캠프 인사를 위한 자리 배분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성패를 가른다. 대통령의 용인술이 관건이다. 하여 영화 ‘탑건: 매버릭’(2022) 속에서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한 매버릭(톰 크루즈)을 탑건 훈련학교 교관으로 발탁하는 태평양 함대사령관 아이스맨(발 킬머)의 인사 기준을 차용하면 어떨까. 매버릭에게 낙하산을 달아준 아이스맨의 발탁 기준은 한결같았다. “누가 더 나은 파일럿인가?”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속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의 진법을 완성해가는 과정도 인사의 교본으로 삼을 만하다. 장수의 성품과 장단점을 두루 파악해 ‘진’을 짜고, 학익진을 반대한 원균마저 포용하며 ‘진’을 완성해 한산대첩을 일궜다.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대통령의 정무감각도 중요하다.
대통령실과 바로 인접한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정조가 쓴 편지를 담은 정조신한(正祖宸翰)이 전시돼 있다. 정조가 정적이자 노론의 핵심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이 편지에서 인사 문제, 세간의 풍문, 민심의 동태 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의논한다. 정치적 현안을 거중조정 하며 정국을 이끌던 국왕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대통령의 ‘텔레그램 문자’가 여당의 내부총질이 아니라 야당 지도자와 공공기관 개혁을 두고 벌인 공방이었다면 대통령의 지지율은 어땠을까. 정권 초반 이슈의 중심에 ‘법무장관 한동훈’이 아니라 ‘경제부총리 추경호’가 있었다면 정국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공공기관 개혁의 성과로 추 부총리가 스타장관이 돼야 대통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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