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로 유명한 일본의 중견 소설가
로봇 청소기와의 애틋한 이별 담아
2010년부터 9년간 쓴 단편 8개 묶어
풍부한 상상력·성찰적 시선으로 표현
아동학대 사건 등 사회문제도 다뤄
“어이, 괜찮아?”
어느 날 원반처럼 생긴 ‘룸바’가 집안 문턱에 닿자, 아빠는 다정한 목소리로 룸바에게 말을 걸고 격려했다. 고령의 부모에게 선물해준 로봇 청소기 룸바는 매일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소파 아래는 물론 집안 곳곳의 바닥을 훑고 다니며 청소했다. 아빠는 그런 룸바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룸바가 예상대로 문턱에 걸려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아빠는 룸바를 살짝 들어서 구출했다. “매일 힘내서 청소해 주었어.”

일본의 중견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는 아빠의 이런 모습에 내심 놀라고 감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책 ‘모리코 봄(杜子春)’을 사다주고 여러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준 아빠가, 동물 모습도 아닌, 단순한 원반 모양의 청소기에 불과한 로봇에 친애의 정을 품다니…. 불현듯 아이디어가 하나 솟아올랐다. 장래 인간과 가까운 형태의 로봇과 공존하게 된다면….
“고령의 부모님께 원반처럼 생긴 로봇 청소기를 선물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빠가 무척 마음에 드셨던지, 매일 열심히 바닥을 훑으며 돌아다니는 로봇 청소기를 마치 반려동물처럼 귀여워하시더군요. 이런 단순한 형태의 로봇에도 인간은 친애의 정을 품는구나, 하고 내심 감탄했어요. 그 체험이 이 작품의 아이디어로 이어졌습니다.”
로봇과의 애틋한 이별을 그린 미야베의 단편 SF ‘안녕의 의식’은 이렇게 태어났다. 어느 날, 로봇 폐기시설 접수창구 당번을 서게 된 나에게 노구치봉사회 소속의 한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폐기된 로봇 하먼은 구형이어서 새로운 것으로 대체돼야 하지만, 고아 출신으로 애정이 쌓인 여성은 고쳐서 계속 함께 살고 싶다고 호소한다. 같은 고아 출신인 나는 그녀와 함께 보관 창고에 가서 로봇 하먼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세계에서 나는 더는 인간이 아니면 좋겠다. 이 세계에는 인간보다 로봇이 어울린다. 아니라면 다들 저렇게, 저 여자애처럼, 로봇을 위해 울고 로봇을 걱정하며 로봇과 마음을 나누려 할 리 없다. 로봇을 하나 조립할 때마다 나는 인간에서 멀어져간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 로봇은 되지 못한다. 그것이 답답해서, 원통해서…. 나는 때때로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그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로봇은 결코 하지 않는 행위이지만.”(194∼195쪽)

한국에도 탄탄한 팬덤을 가진 미야베 미유키의 첫 SF 소설집 ‘안녕의 의식’(비채)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안녕의 의식’을 비롯해 2010년부터 2018년까지 틈틈이 쓴 단편 SF 8편을 묶은 것으로, 일본에선 2019년 출간됐다.
소설집은 일본 현지에서도 다양한 장르 소설을 써온 미야베가 SF소설을 본격적으로 썼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미스터리, 시대 소설, 판타지와 폭넓은 장르를 다뤄온 미야베씨가 정면으로 SF와 마주했다”고 주목하기도 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알려진 미야베는 왜 SF를 써야 했을까. 그가 보여주는 SF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미야베 작가를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서 최근 이메일로 만났다.
―사회파 추리소설로 알려져 있는데, SF를 쓰셨습니다.
“‘안녕의 의식’은 오랜 기간에 걸쳐 쓴 중단편을 모은 책인지라, 출간 당시 제가 강하게 SF 쪽으로 마음이 쏠려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다양한 장르의 기법을 도입도 하고 흉내도 내는 과정에서, 그럴싸한 것이 나오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시도해본 결과, 이 아이디어는 SF적 기법을 사용하면 내가 원하는 글이 나오겠다, 라고 생각했을 때, 결과적으로 SF적인 작품이 나옵니다.”
―표제작 ‘안녕의 의식’은 로봇과 인간을 다룬 작품인데, 로봇 시대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 자신, 장차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가 왔을 때 안심하고 몸을 맡길 로봇이 개발되어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다만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로봇이 극진히 돌봐준다고 해도, 인간의 온기가 필요한 일은 사라지지 않을 테죠. 로봇이 활약하는 시대에도 사람 손을 요구하는 일은 다방면에 여전히 남을 것이고, 또 새로이 태어나기도 할 것이며, 그러면서 로봇과 인간의 관계성이 선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엄마의 법률’은 학대받은 아이와 그 부모를 구제하는 ‘마더법’과, 친부모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기억 침전화’와, 이를 집행하기 위한 ‘마더 위원회’가 중심 배경을 이룬다. 친부모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양부모 슬하에서 자랐던 후타바는 양부모마저 사망하자 ‘그랜드 홈’에 맡겨진다. 그런데 어느 날 친족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수가 된 친모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면서 흔들리는 자신을 대면한다.
―친권을 가족이 아닌 국가가 행사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이 단편의 아이디어가 작게 싹을 틔웠을 무렵, 우연히 읽은 책에서 교육자와 사법관계자 사이에 아동 학대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친권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논의가 오고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인 힌트가 됐지요.”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한번쯤 떠올리게 하는 ‘별에 소원을’은 여동생을 돌봐야 하는 고교생 언니 아키노의 이야기다. 아키노는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한 초등학생 여동생 하루미를 데리러 간다. 이때 동네에선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해 범인이 도주 중이고, 운석까지 낙하해 흉흉한 소문이 나돈다. 아무래도 하루미 속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 느낌이 드는데.
―‘별에 소원을’의 매력적인 주인공 아키노는 십 년 후 어떻게 될까요.
“주인공은 나이도 어린데, 고생을 마다않는 성실한 여자 아이입니다. 저는 이런 캐릭터를 매우 좋아해서, 이 여자애도 십 년 후에는 자신에게 걸맞은 행복을 찾았으리라 생각하면서 작품을 썼습니다.”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난 미야베 미유키는 1987년 단편 ‘우리가 이웃의 범죄’로 올요미모노(オ?ル讀物)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이후 ‘이유’, ‘모방범’, ‘화차’, ‘가모우 저택 사건’, ‘이름 없는 독’, ‘고구레 사진관’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야마모토슈고로상, 나오키상, 시바료타로상, 요시카와에이지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고, 상당수 작품이 영화화됐다.
―소설 쓰기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보다 퇴고입니다. 저는 몇 번이고 읽고, 고치고, 읽고, 고칩니다. 그리고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보내죠(그러기 위해 마감이 필요하고요).”
이게 뭐지, 뭔가 오래된 느낌인 걸…. 미래 이야기를 그린 그의 SF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묘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할 수 없는, 뭔가 오래된 느낌! 만약 그런 느낌이 감각해 온다면, 소설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왜냐고? 그것이 바로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전략이자, 개성이고, 글쓰기 정신이니까. 작품 발상과 새로움은 늘 오래된 취미나 기호, 생각 등 그의 일상에서 잉태돼 왔으니까. 한결같이 독서인 취미와, 미스터리와 호러, 서스펜스를 한결같이 좋아하는 기호와, 반려묘와 뒹굴거리며 낮잠을 즐기는 일상과, 어렸을 때는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게 있다고 둥글해진 생각과….
“제 책을 처음 접하시는 젊은 독자들은 이 작품집 구석구석에서 뭐라 할 수 없는 ‘오래된 느낌’을 받지 않으실까 싶어요. 그것이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개성이기도 하니까, ‘뭔가 오래된 느낌인걸’ 하고 생각하시면서, 그 ‘오래됨’ 속에서 재미를 발견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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