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들의 압박, 위약금 위협 등에
성폭력에 무기력하게 노출되는 구조
영상 유포 빌미로 협박해 ‘벗방’ 강요
“(피해자는) 게스트로 출연 요청에 응했다가, 생방송 중 강제추행 당하고 포르노 사이트에 영상이 유포됐어요. 그걸로 협박을 받아 노출 방송을 해야 했고요. 이후 자해를 여러 번 해서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피해자측 천호성 변호사)
피부관리실에서 일하던 평범한 여성이 단 몇 달 만에 ‘벗방(옷을 벗는 방송) BJ’가 됐다. 자의가 아니었다. 팬더TV라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BJ로 활동하는 A씨로부터 게스트 출연 제안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출연 제안→라이브 중 강제추행→영상유포 협박으로 ‘벗방’ 강요
세계일보 취재진은 협박에 의해 추행 및 벗방을 강요받은 피해자 김예인(가명)씨의 이야기를 그를 대리하는 천호성 변호사로부터 들었다. 처음엔 신원을 공개한 채 문제를 적극 알리려 했던 김씨는 2차 가해가 심해지면서 직접 인터뷰하기 힘든 상태가 됐다.
사건의 시작은 2021년 11월 김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온 A씨의 메시지.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송에 출연하면 1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부업을 알아보고 있던 김씨는 A씨의 방송 출연 요청을 큰 경각심 없이 승낙했다.
방송 시작 전 A씨는 김씨에게 “형식적인 절차”라며 계약서를 내밀고는 “술 마시면서 게임하면 되는 거고, 방송 중에 가벼운 스킨십이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계약서를 충분히 읽어볼 겨를도 없이 방송이 시작됐다. ‘가벼운 스킨십’이란 말과 달리 A씨는 방송 중 김씨의 음부를 만졌다. 김씨가 놀라서 거부하니 A씨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끄고 계약서를 들이밀며 “중간에 그만두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협박했다.
첫 출연 이후 본색을 드러낸 A씨는 협박의 수위를 높였다. 이 악몽에서 쉽게 깨어나기 힘들겠다고 김씨는 직감했다. A씨는 “10회 출연 계약이었다”는 말로 다시 출연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하는 김씨에게 A씨는 지난번 출연한 영상을 김씨의 지인들이 볼 수 있도록 SNS에 유포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가족이 볼까 두려웠던 김씨는 다시 방송에 출연했다.
실시간 방송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성폭력으로 모자라 그 장면을 아는 이들에게 퍼뜨리겠다는 협박까지. A씨는 “앞으로 괴롭히지 않겠으니 엔터테인먼트와 BJ로 계약하자”고 제안했다. 자포자기한 김씨는 지난해 1월 팬더TV의 벗방 BJ가 됐다. 동조하고 방조하는 시청자들과 문제를 방치하는 플랫폼의 외면 속에서 김씨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위약금을 빌미로 한 협박이 이어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김씨는 지난해 5월30일 BJ 활동을 접었다. 방송 수익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그는 지난해 12월 소속사 대표를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청구했다. 법원은 대표에게 “김씨에게 약 80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지만, 김씨는 그 돈을 아직 받지 못했다.
피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방송이 끝난 뒤 녹화된 방송 영상이 음란물 사이트에 유출됐기 때문이다. 천 변호사는 “게스트로 출연했다가 이런 일을 당하고 영상이 유출돼 결혼 파혼을 당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피해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직장 생활은커녕 바깥을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채팅창에서 옷 벗으란 요구 쏟아져”…누구나 당할 수 있는 피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김씨와 같이 인터넷 방송에 출연했다가 성폭력 피해를 본 이들을 돕는 공동지원단을 출범했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게스트 강제추행, 엔터테인먼트(소속사)의 BJ 협박 등 출연자에 대한 성착취를 플랫폼은 사실상 눈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 개인방송 플랫폼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법제가 미비해, 영상이 음란물 사이트에 유포되는 등 2차 가해도 반복되고 있다.
천 변호사에 따르면 인터넷 방송에서 입은 성착취 피해 제보는 최근에만 20건에 달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인터넷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했다가 동의하지 않은 추행을 당하거나 유사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동작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BJ는 초대한 게스트가 주저하거나 거부하면 비상식적인 금액의 위약금을 들먹였다. 천 변호사는 “얼핏 생각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막상 방송 채팅창에서 ‘왜 옷 안 벗냐’는 시청자들의 욕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며 “사회 경험 없는 20∼30대 여성이라 협박에 취약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게스트 강제추행과 엔터테인먼트의 BJ 협박 문제에 대해 여파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여파 활동가는 “게스트 방송에 출연했다 술에 취한 상태로 준간강이나 강제추행 사례로 상담받은 경우가 있다”며 “벗방 BJ가 방송을 그만두고 싶을 때 계약서를 문제 삼아 위약금으로 협박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약서상 위약금이 말도 안 되는 문제도 있지만 계약서를 소속사만 가지고 있어 BJ가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꼬집었다.

◆법제 미비로 되풀이는 ‘성착취 방송’…방송 전후 과정 더 살펴야
선정적인 인터넷 방송을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방심위는 관련 법령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방심위 관계자는 “개인 방송 자체에 대한 법령이 없어 통신 심의에 준해서 심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5년 방심위의 심의 현황을 토대로 “선정적인 인터넷 방송 수에 비해 시정요구를 조치한 건수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입 모아 지적했다. 방심위가 시정요구 조치한 건수는 2022년 34건, 2021년 4건, 2020년 27건, 2019년 21건으로 해마다 30건 안팎에 그쳤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인 서혜진 변호사는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결국 심의위원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며 “기준의 문제도 있지만 인터넷 방송 특성상 문제가 되는 영상이 금세 사라지는 문제도 있어 지금의 심의 관련 법령이 실효성 있는 해법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비판했다.
단순히 방심위 심의 규정을 보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반적인 불법촬영물과 달리 방송이 된 화면은 영상 유포 등 2차 가해를 당해도 피해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방심위 관계자는 “게스트가 영상 유출 피해를 입은 경우엔 성 관련 초상권 침해 사례로 조처하고 있다”면서도 “BJ가 영상 유출 피해를 입은 경우에는 공개를 전제로 한 방송 화면을 녹화한 것이라 비동의 촬영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여파 활동가는 “방송에 출연했다고 해서 모든 장면이 유포되는 것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며 “동의 여부를 편협하게 보는 제도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서혜진 변호사 역시 “방송에 출연한 게스트는 방송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에 대해 사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며 “속아서 출연했다거나 약물 사용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는 만큼 방송 전후로 벌어지는 피해를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돈 되니까 방치…“19금 표시는 규제 아닌 ‘고수위 콘텐츠’ 광고”
출연자에 대한 성착취 방송이 공론화돼도 결국 해결되지 않는 까닭은 성인 방송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인터넷방송 플랫폼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어서다.
서 변호사는 “성인 방송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덕에 플랫폼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라며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는데, 지금 있는 규제로는 플랫폼의 수익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너무도 명확한 강간 수준의 성폭행인데도 사람들이 시청한다. 방송 플랫폼에 걸려 있는 ‘19금’ 표시는 플랫폼의 규제라기보단 오히려 ‘수위 높은 콘텐츠’라는 걸 광고하는 효과가 있다”고 꼬집었다.
천 변호사는 개인방송 플랫폼에 대한 고소·고발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게스트를 강제추행한 BJ와 위약금으로 협박한 소속사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를 방조한 플랫폼”이라며 “음란물 유통 방조로 해당 인터넷 방송 플랫폼 대표이사에 대한 고소·고발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플랫폼이 성인 방송으로 돈을 버는 것은 음란물 유통을 방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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