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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자녀 특채 논란으로 시끌
견제받지 않는 독립기구의 ‘민낯’
자체감사 결과와 후속대책 발표
총선 앞 성역 깨는 쇄신책 마련을

얼마 전 작고한 문용린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생전에 마이클 샌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 이런 추천 글을 남겼다.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장점을 가진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비판이다. 사실 개인 능력은 지능과 노력의 결합이다. 능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언뜻 보면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 능력이 본인보다 부모에 의해 좌우될 때다. 부모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을 기회 삼아 자녀가 이득을 누리는 ‘아빠 찬스’가 대표적이다.

박병진 논설위원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2019년 조국 사태 때 불거졌던 아빠 찬스 논란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반칙 없는, 특권 없는 세상’을 기치로 내세웠던 정권은 시나브로 무너져 내렸고, 청춘들의 좌절감에 더해 사회는 극심한 분열상을 겪었다. 그래도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지난해 단체협약에 ‘자녀 특채’를 못 박은 민주노총의 아빠 찬스 남용 논란이 일 때까지는. 당시 여동생이 남편 회사에서 자녀 고용 세습을 제의해 왔다며 고민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갔지만 상식과 공론을 내세워 타박하지 못했다. 팔이 안으로 굽었던 탓이다. 그만큼 아빠 찬스 사용이 우리 일상과 함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올해 창설 60주년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요즘 아빠 찬스로 불리는 자녀 특채 논란으로 시끄럽다. 기존의 고위직 자녀 6건에 더해 4∼5급 직원의 특채 사례 5건도 추가됐다고 한다. 위아래 없이 철저히 썩은 조직이 아닌지 의혹이 번질 수밖에 없다. 제기된 내부 공모 의심은 사실일 개연성이 더 높아졌다. 사안의 휘발성이 워낙 커 사태가 어디까지 번질지 예단이 쉽지 않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관리 책무를 맡은 선관위는 공정·청렴성이 생명이다. 헌법상 독립기구로 둔 이유다. 하지만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는 조직은 썩기 마련이다. 철칙이다. 선관위 조직도 이런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전조는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해 3월 대선 사전투표 당시 ‘소쿠리 투표’에 국민들은 경악했지만,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구”라며 감사원의 직무감사를 뿌리쳤다. 얼마 전에는 북한 해킹 위협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보안점검 권고까지 거부했다가 물의를 빚자 번복하기도 했다. 외부와 담을 쌓다가 결국 고인 물이 썩어 들어간 것과 다름없다.

선관위가 어제 과천청사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관련한 자체감사 결과와 후속대책을 발표했다. 자체감사에서 부정 승진과 함께 박찬진 사무총장(장관급) 등 고위직 4명의 자녀가 채용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수사 의뢰하기로 했다. 논란에 휩싸인 ‘비다수인 경력 채용’을 폐지하고, 사무총장 등 정무직을 외부에서 영입하는 방안 등도 제시됐다. 만시지탄이다.

애초 선관위 자정 노력으로 쌓인 풍파를 헤쳐 나가기는 역부족이었다. 환부를 도려낼 시기 또한 놓쳤다. 비슷한 일이 1년 전에도 있었지만 ‘셀프 감사’로 뭉개질 않았나. 이러니 그들만의 리그에 복마전으로 전락할 수밖에. 언론의 문제 제기가 없었다면 지금도 “공정한 채용”이라고 발뺌하고 있을지 모른다. 국회 국정조사를 감수하겠다고도 한 노태악 선관위원장은 이날 “사퇴 계획은 없다”고 했다. 책임자로서 뻔뻔하기 그지없다. 무너진 조직 기강이 바로 설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당장 내년 총선이 10개월여 앞이라는 점이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선거관리 기관의 공정성이 흔들리면 선거 결과에 불신을 초래할 것임은 자명하다. 대법관이 돌아가며 관행적으로 맡아온 비상근 선관위원장에서부터 감사 제도까지 조직 전반을 손봐야 마땅하다. 더 이상 선관위에만 쇄신을 맡길 단계가 아니지 않은가.


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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