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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미군 사기 딛고… 어떻게 한국전 흐름 바꿨나

입력 : 2023-06-23 23:00:00 수정 : 2023-06-23 20: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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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美8군 이어 유엔군 사령관 오른
리지웨이 장군이 직접 쓴 한국전 회고록

후퇴하던 시기 부임… 우선 ‘軍 추스르기’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 전군에 서신도

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까지 과정 조망
더 이상 확전 피하고 ‘제한전’ 관리 성공
美 어떤 노력했고 무엇을 배웠는지 전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매슈 B. 리지웨이/박권영 옮김/플래닛미디어/2만5000원

 

“자네 스스로 판단을 내리길 바라네. 나는 자네를 적극 지원할 것이고 완전히 신뢰하네.”

미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극동군사령부가 있는 도쿄 다이이치빌딩에서 새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에게 중공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이같이 말했다. 정오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출발, 오후 4시 대구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그는 미8군 사령관의 임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매슈 B 리지웨이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몰려오던 시기 미8군 사령관에 부임해 반격을 이끌어내고 다시 유엔군 사령관으로 정전협정을 이끈 리지웨이의 회고록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사진은 스미스부대,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리지웨이 장군, 인천상륙작전 모습. 출판사 제공

리지웨이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뛰어든 1950년 12월26일은 중국 지원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하던 시기였다. 한국군은 6월25일 새벽 강력한 포격과 함께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내려온 북한군에 밀려서 낙동강까지 쫓겼다가, 9월15일 유엔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국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급기야 1951년 1월4일 서울을 다시 내줘야 했다. 이때 미군과 국군, 유엔군 모두 사기가 뚝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용감해 부여된 어떤 임무라도 수행할 각오가 돼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불안해하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감에 차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군대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열정과 기민함, 활력이 부족했다.”

리지웨이는 우선 미군과 유엔군, 국군을 추슬러 전투의지를 회복시키는 한편 공세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전투의지의 회복, 부대에 대한 자긍심, 리더십에 대한 신뢰, 임무에 대한 신념을 가지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1월21일에는 전 장병에게 지휘서신을 내려보냈다.

매슈 B. 리지웨이/박권영 옮김/플래닛미디어/2만5000원

“단순히 한국의 도시나 마을 이곳저곳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토의 문제는 부수적인 사안입니다. … 이것은 명예롭고 독립적인 국가에 사는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치른 희생과 앞으로도 치러야 할 희생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직접 지키기 위한 행동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리지웨이는 적들에 비해서 아군의 수적인 열세를 미군의 강점인 화력의 우세로 극복하기 위해서 아군 부대 간 긴밀한 연계와 협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1951년 1월25일, 미군과 유엔군, 국군은 신중한 반격을 시작했다. 2월 원주 북서쪽에 위치한 지평리 지역에서 중공군 5개 사단의 공세를 격파하면서 승기를 잡았고, 3월14일 서울을 다시 회복한 뒤 진격을 이어갔다.

중공군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황이 분명해지자, 그는 아군 부대 간 연계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공군의 공세를 대비했다. 이후 전선은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했다.

4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서 전격 해임됐다. 리지웨이는 맥아더에 이어서 유엔군 사령관에 올랐고, 그의 후임에는 제임스 밴 플리트가 부임했다. 그는 맥아더 해임과 관련해 “반역적인 패거리의 음모”나 “맥아더 장군이 아시아 대륙의 전면전으로 미국을 밀어넣으려 한다”의 비난, “두 사람 간 성격차” 등의 분석 모두 근거 없고 명령불복종에 대한 단순한 해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진짜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전쟁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간의 극심한 견해 차이도 아니었고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아니었다. 마셜 장군이 상원위원회의 증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저 대통령이 가장 분명한 용어로 반복적으로 전달한 정책에 대해 한 명의 지역 전구 사령관이 공개적으로 이의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는 밴 플리트에게 최대한 전술 지휘권을 부여하면서도 전술계획 승인권을 통해 전쟁이 더 이상 확전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제한전으로 관리해 나가는 한편, 막오른 휴전협정을 끈질기게 이어가면서 전쟁을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최근 번역 출간된 책은 리지웨이 장군이 쓴 한국전쟁 회고록이다. 책에는 미국이 내부적으로 출구전략을 고심하고 있을 때 어떠한 모습과 자세, 전략으로 미8군을 이끌고 유엔군을 지도했는지를 적고 있다. 책은 1967년 미국에서 출판됐고,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번역됐다.

저자는 한국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까지 전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애치슨 선언의 전말, 첫 전투를 벌이며 본진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준 스미스특임부대, 맥아더의 천재적인 지략이 빛난 인천상륙작전, 북진하며 전력을 분산한 맥아더의 뼈아픈 패착, 전선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렸던 중공군의 나팔 소리, 정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판문점의 모습….

저자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리지웨이가 한국전쟁에서 깨달은 교훈들은 무엇일까.

“우리가 한국에서 피해야 했던 한 가지 실수는 평화를 논의하기 전에 ‘완전한 승리’나 ‘무조건 항복’ 또는 ‘침략행위의 중단’을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 공공의 공간과 언론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슬로건들을 보면서 나는 모든 국민이 과연 제한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한전은 단순히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은 소규모 전쟁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제한전이란 국가이익과 현재 군사적 능력을 고려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제한하는 전쟁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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