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쿠데타·캄보디아 세습 사태
필리핀, 마르코스 정치가문 재등장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모범 사례
“(태국)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제안이다. 선거를 통해 표출된 유권자들의 뜻을 왜곡할 수 있다.” (제1당 전진당, 제2당 프어타이당의 총리 후보 지지 요청을 거부하며)
“피타 후보 본인이 포함되지 않은 청원인들의 권리가 침해된 적이 없고,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다. 청원 제기 자격이 없어 해당 사안을 심리하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헌법재판소, 총리선출 투표 무산에 대한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며)
지난 5월 치러진 총선에서 개혁·중도 세력 승리로 군부정권 종식 기대감이 분출됐던 태국 정국이 3개월째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총리 선출을 통한 민주화 일정 복원이 지연되고 있다. 총선에서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유권자들은 개혁성향의 전진당(MFP·까우끌라이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지만, 보수세력과 군부의 반발로 정치·민주화 시계가 불투명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 태국 총리 선출 실패 반복…1932년 입헌제 이후 쿠데타 22차례 발생
전진당이 다른 7개 정당과 함께 총리 후보로 내세웠던 피타 림짜른랏 대표는 7월 의회의 총리 선출 투표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군부 입김을 강하게 받은 상원의원 250명과 총선 민의로 뽑힌 하원의원 500명 등 750명이 모인 상하원 합동총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지 못했다. 피타 대표는 의원직 유지마저 장담 못할 처지에 몰렸다.
제1당의 밀었던 후보의 총리 선출이 좌절된 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이 이끈 제2당 프아타이당이 보수세력과 타협하며 연립정부 구성을 도모하고 있지만, 전진당은 참여를 거부했다. 총선 민의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개진한 것이다. 프아타이당 주도의 연정 구성 노력이 성과를 보지 못하면 3당 픔짜이타이당이 총리선출 임무를 부여받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태국에서 목격되는 일련의 정치 일정은 동남아 민주주의 과제가 쉽게 실현되기 힘들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태국과 오랜 라이벌이었던 미얀마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2021년 2월 쿠데타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중심의 민간정부는 군부정권에 밀려났다. 국민 저항과 국제사회 제제·비판에도 군정은 국가비상사태를 연장하며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 군정 미얀마, 순번제 아세안 의장국 포기
미얀마 군정 체제는 주변 국가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정 불간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ASEAN)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군정에 대한 대응을 두고 크게 대륙부 동남아와 해양부 동남아가 의견을 달리하며 아세안이 좀처럼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군정은 2026년 예정된 미얀마의 아세안 의장국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최근 표명했다. 아세안 의장국은 국명의 영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올해 의장국은 인도네시아이며, 2024년 라오스, 2025년 말레이시아 차례가 예정돼 있다. 1997년에 아세안에 가입한 미얀마는 2006년에도 의장국 지위를 포기했으며, 민간정부가 구성됐던 2014년엔 의장국 지위를 수행했다.
태국·미얀마와 같은 대륙부 동남아 국가로 분류되는 캄보디아는 유사 왕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7월 명목상의 총선을 통해 절대적 입지를 확인한 훈센 총리는 이달 22일 4성장군인 아들 훈마넷에게 권력을 넘긴다. 국제사회는 훈마넷의 미국·영국 유학 경험 등을 거론하며 아버지 훈센 시절에 비해서는 개방정책을 펼칠 여지가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 태국·미얀마·캄보디아 군부 영향력 절대적
태국·미얀마·캄보디아에서는 군이 최고 권력집단이거나 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미얀마는 짧은 기간 민주주의 궤도에 올라탔다가 이내 쿠데타를 경험했으며, 태국에서는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군사쿠데타만 22차례 발생했다. 캄보디아에서도 군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눈을 해양부 동남아로 돌리면 어떨까, 대륙부 동남아에 비해 민주화 경험과 여건이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밋빛 상황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인 사례가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1980년대 중반 ‘피플 파워’로 민중의 힘을 보여줬지만, 일부 정치가문이 돌아가며 차지하는 집권체제를 끝내지 못하고 있다. 물러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게 필리핀 족벌 정치체제의 한 특징이다. 지난해도 그런 과정을 보여줬다. 피플 파워로 밀려나 망명지 미국 하와이에서 숨졌던 독재자 마르코스의 장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독재의 잔영이 강한 ’올드 레짐‘(구 체제)의 귀환이었다.
◆ 내년 2월 대선 인도네시아…구체제 프라보워 포함 후보 3인 각축
동남아 인구대국 인도네시아는 어떨까. 인도네시아는 내년 2월 14일 대선·하원·지방의회 동시선거를 앞두고 있다. 대선 일정이 6개월 이내로 들어선 셈이다. 민주화 이후 우기에 실시되는 첫 선거이다. 인도네시아 홍수 등에 취약한 구조여서 선거 당일 날씨 등이 투표율에 미치는 영향도 클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는 미국, 인도에 이어 인구로는 세계 3위의 민주주의 국가로 자부하는 나라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로, 이슬람권에서는 흔치 않은 민주주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로도 언급된다. 1998년 개발독재의 상징 수하르토의 실각 이후 4반세기가 넘는 민주화 여정을 거쳐 왔지만, 마치 필리핀에서처럼 올드 레짐이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군부의 영향도 여전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0년 연임의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이 연정을 펼치고 있다. 10월 정당들의 공식 후보 지명을 앞두고 3명의 유력주자가 경쟁을 펼치고 있다. 최근 구체제의 상징인 프라보워 수비얀토 국방장관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며, 지지세를 키우고 있다. 프라보워 장관은 2014년, 2019년 2차례 대선에서 조코위 대통령에게 연이어 패했다. 이보다 앞서 2009년엔 수카르노푸트리 투쟁민주당(PDI-P)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팅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라보워는 대선 패배에서 협치를 모토로 내건 조코위 대통령의 선택에 따라 연정에 장관으로 참여했다.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였지만, 그가 실각한 1998년 아내와 이혼했다. 수하르토는 군사쿠데타를 통해 32년간 장기 집권했다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무렵 ‘에라 레포르마시’(개혁시대) 시작을 앞두고 실각했다. 프라보워는 당시 민주화 열기 속에서 민주인사 납치 등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비판받고 있다.
◆ 말레이시아, 민주주의 모범적 구현
여러 색감과 층위를 드러내지만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민주정치 체제를 뿌리내리지 못한 가운데 연방체제의 반도국가 말레이시아의 정치상황은 확실히 모범적으로 보인다.
12일 치러진 말레이시아 지방선거는 의미 부여가 가능한 과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지방선거는 보편적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해 냈다. 말레이계와 중국계, 인도계 등으로 국가 내부가 복잡한 다민족 체제라는 어려움 속에 이룩한 성과였다. 동남아 이웃나라들이 군부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노정에서 힘에 부쳐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 선거에서 말레이시아 집권세력과 야당연합은 각기 3개주에서 다수당 지위를 유지했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희망연대(PH)·국민전선(BN)은 슬랑오르·페낭·너그리슴빌란 3개주에서, 야권 국민연합(PN)은 끌란탄·트렝가누·끄다 3개주에서 승리했다. 말레이시아 전체 13개주 가운데 6개주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개혁성향의 집권세력은 연정체제를 확인했으며, 이슬람 색채를 강화한 보수야당은 의석 점유율을 높이며 대안세력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를 축으로 한 집권세력은 6개주에 할당된 245개 의석 가운데 99개 의석을 차지했다. 이전 147개 의석에서 줄어들며 세력 약호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연방정부가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안와르 총리의 연정세력은 2026년을 실시 기한으로 하고 있는 총선까지 경기진작과 개혁 정책을 적극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안와르 총리로서는 2022년 11월 마련된 집권세력의 연정 공고화 작업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기는 하다.
◆ 말레이시아 정치…개혁 정부 vs 보수 야권
무히딘 야신 전 총리가 이끄는 야권은 사실상 집권여당이 패배한 선거였다고 규정하고 있다. 야권이 6개주 전체 245석 가운데 146석을 차지하고, 그간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던 슬랑오르주 등에서 약진을 경험한 덕분이다. 야권 약진에는 젊은 세대의 보수화와 민족지향의 표심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집권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중앙정부의 혼란양상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이는 선거결과에 따라 국정을 책임지는 보편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얀마 혹은 태국에서 포착되는 군부의 영향력도 크지 않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다종교 국가라는 조건 속에서 통합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온전한 상황은 민주화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아세안의 다른 회원국의 상황에 비해 도드라진다. 말레이시아 정치권과 유권자들은 비교우위 평가에 따른 박수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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