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기준에 충족 못하는 품종
유지비 문제로 안락사 일반적
법적 정의 없고 현황파악 안 돼
윤리위, 실험 원안 87%나 승인
일각 “동물수 최소산정 등 의문”
동물대체시험법 연내 통과 주목
서울 한 대학의 동물실험실에서 생물의학을 연구하는 김모(25)씨는 실험동물을 보살피면서 죽이기도 하는 모순된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새끼를 밴 어미 쥐를 해부하고 약물을 주입한 동물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김씨는 실험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그나마 자신을 다독이곤 한다. 하지만 그를 정말 힘들게 하는 건 실험이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일이다. 김씨는 실험이 끝나고 살아남은 동물을 따로 ‘Dead Animal(죽은 동물)’이라고 쓰인 빨간색 카드를 붙인 우리에 넣는다. 사체처리 승인이 떨어지면 이산화탄소(CO₂)로 안락사시킨다. ‘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4일은 동물 애호·동물 보호를 위한 세계 동물의 날이다. 하지만 인간을 대신해 고통을 겪고 소리 없이 죽어가는 실험동물들의 희생은 이 같은 국제적인 기념일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실험 이후 살아남았거나 애초에 연구 기준을 충족 못하는 ‘잉여 실험동물’은 법적 정의가 없고 현황 역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잉여 실험동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실험 시설마다 설치한 동물실험윤리위원회(윤리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피고, 궁극적으론 생명체를 이용하지 않는 대체실험을 권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농림축산검역본부 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동물실험에 대한 윤리위의 전체 심의(5만7440건) 가운데 87%(5만17건)가 원안대로 승인된 것으로 나타났다. 원안 승인 비율이 가장 높은 실험 기관은 일반기업체였는데 전체 심의 건수 3만5974건 가운데 96%(3만4865건)가 그대로 통과됐다. 윤리위는 실험자가 실험에 필요한 동물 수를 최소한으로 산정했는지 깐깐하게 살펴야 하지만, 절차적 투명성에선 의문이 제기된다. 이형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는 “실험동물의 복지를 윤리위원회에 거의 일임한 상황에서 위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며 “원안 승인 비율이 높은 현상은 의심을 하게 하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식품의약품안전처 소관 실험동물법과 농림축산식품부 소관 동물보호법 어디에도 잉여 실험동물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고 현황 역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동물보호법에서 실험 후 회복된 동물을 분양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유럽연합(EU)은 2017년 실험에 사용하지 않고 도살한 동물(1260만마리)이 실험에 사용된 동물(940만마리)의 134%에 달한다고 추정하고, 잉여 실험동물 발생을 줄이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한 독일 고등법원은 2019년 실험실 내 척추동물을 단순히 경제적 이유로 죽일 수 없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조현정 동물권행동 카라 활동가는 “동물복지에 관심 두는 유럽보다 한국의 상황이 나쁘면 나빴지 좋진 않을 것”이라며 현황 파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리위 점검과 더불어 관련 법제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허선진 중앙대 동물생명공학과 교수는 “잉여 실험동물을 어떤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지 적시하고 용처 개발도 중요하다”며 “정부가 생명체가 아닌 장기유사체(오가노이드·organoid)를 통한 대안실험 방법을 장려하고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한 동물실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현재 국회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한정애 의원이 각각 발의한 ‘동물대체시험법’이 계류 중이다. 남인순 의원실 관계자는 “그동안 부처 간 협의가 잘 되지 않아서 법안 처리가 어려웠다”면서 “최근 식약처와 환경부가 공동소관으로 하는 것으로 조율이 상당 부분 이뤄졌고 여야 이견도 없어 올해 안에 통과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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