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기사에 빠지지 않는 댓글이 있다. ‘정치인을 인공지능(AI)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정쟁에만 몰두하는 정치인 대신 객관적인 기계가 정치를 하는 것이 낫다는 논리다. 언뜻 괴변처럼 들리지만 지난해 11월 덴마크에서는 AI 당수를 앞세운 정당(신서틱 파티·인조 당)이 선거에 나서기도 했으니 이제는 공상과학(SF)이 아닌 현실이다.
최근 취재팀은 미국·영국·독일·핀란드·덴마크 등 AI 선진국을 둘러보며 ‘AI 앞에 선 민주주의’ 현황을 취재했다. AI 기술을 탑재한 가짜뉴스, AI가 수집하는 개인정보로 인한 사생활 침해 우려, 알고리즘 추천 서비스의 편향성 문제 등 AI가 민주주의의 기본권을 위협하는 일들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AI와 관련한 사건·사고는 2010년 10건에서 2021년 260건으로 26배 급증했다. 국제사회는 핵을 감시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같은 AI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까지 내놓는다. AI가 미칠 파급력이 핵폭탄에 맞먹기 때문일 것이다.
AI를 활용한 가짜뉴스는 외신에서만 전해 오는 일이 아니다. 국내 보이스피싱범들도 이를 활용해 지능범죄의 수준을 높이고 있고, 전문가들조차 구별하기 힘든 가짜 정보가 대량으로 생성돼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AI발 가짜뉴스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500여명 규모의 AI 전담팀까지 꾸려 모니터링과 단속에 나서고 있다.
AI로 인한 위협은 미래가 아닌 현재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인간의 일자리와 군주제 같은 정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놨고, 정보통신기술(ICT) 시대는 노동 환경을 거대 플랫폼에 종속적으로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AI 시대에는 기술이 인간의 지식 노동까지 대체하고, 정치 체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암울한 전망 속에도 선진국들은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만난 헬싱키 시민 카리 칼리오(65)는 자처해서 AI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는 ‘엘리먼츠 오브 AI’라는 대국민 AI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이를 통해 이미 170개국 100만명이 AI 교육을 받았다. 45세 이상 중·장년층의 AI 교육 비중도 26%에 달한다. 키오스크 사용에서조차 소외되는 한국의 장년층과는 다른 처지다. 해외 선진국들은 이미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AI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AI가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점검에 나섰다. 독일은 정치인과 전문가, 시민사회 등이 참여한 국회 특위가 활동을 마치고 보고서를 발간했다.
여기서 우리나라로 눈을 돌리면 앞이 캄캄해진다. 내년이면 임기를 마칠 21대 국회는 AI 관련 법안을 10여건 발의했지만 아직 한 건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정부도 ‘인공지능 산업 육성 및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법률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언제 통과될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AI 시대에 벌어질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법적 논란을 풀어야 할 국회가 AI 시대 준비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국민에게서 더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이러다 정말 유권자들에게 AI가 아닌 ‘인간 정치인’의 필요성을 호소해야 할 때가 오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AI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는 것은 인간의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라던 이상욱 유네스코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 부위원장의 경고가 기우에 그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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