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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에 대한 의식이 흐리던 시절, ‘환경 조사서’, ‘신상 조사서’ 따위를 작성하는 때가 있었다. 그 양식에는 취미란이 있는데, 마땅히 떠오르지 않으면 대개 ‘독서’라고 적었다. 독서는 그렇게 등산이나 바둑처럼 취미의 하나가 되곤 했지만, 누구나 그게 취미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학교에서 항상 중요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실상 독서는 구호에 불과했다. 장관이나 교장이 바뀌면 불쑥 ‘독서 운동’이 벌어지고 방학 과제로 가끔 등장했을 뿐, 학습 자체가 교과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참고서 외우기만 답습한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시험 범위 밖’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성적이 처지고, 성적이 좋아 잘 풀리는 사람은 독서의 맛을 모르는, 그래서 그게 결국 취미의 일종이 되고 마는 경향이 생겼다. 한데 진학, 자격 취득 같은 당장의 필요만을 위해 책을 ‘보았을’ 뿐, 거기서 스승을 만나거나 길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지침 삼아 삶을 영위할까?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도서관과 인연이 없는 그는, 대체 어떻게 평생 동안 자기를 계몽시켜 나갈까?

전자매체 혁명은 한국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독서문화진흥법’까지 만들 정도로 독서율이 낮은 형편에, 디지털 화면이 책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게임이나 웹툰, 유튜브 등의 ‘구독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 반해 서적의 ‘독자’는 현저히 줄었다. 그래서 문화 수준 저하를 걱정하는 일각에서는 ‘읽기’와 문해력을 강조하면서, 교양과 지식 함양을 목표 삼던 과거와는 달리, 그게 두뇌 발달에 좋다고 한다. 인공지능 때문에 인간의 뇌가 주로 언어로 배우고 사고한다는 사실이 부각되자 독서의 기능면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독서든 읽기든, 언어로 사물을 인식하는 활동은 먹는 일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머리는 물론 가슴도 발달시켜 명석하고 원만한 인간이 되게끔 도와준다. 앞에 인용한 칸트의 말에서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를 가리키는데, 자기를 계몽하여 스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행위가 바로 독서이다. 그것은 취미나 기능을 넘어서는, 성장을 추구하는 인간의 삶 자체이다.


최시한 작가·숙명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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