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기습 공격에 심각한 도전 직면
CIA 경고에도 팔레스타인 문제 외면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 등 허점 드러나
NYT “美, 예전같은 지배적 강국 아냐
하마스 공격 이후 다극화 체제 본격화”
핵무기 확산 등 군비경쟁 가속화 우려
대선 앞둔 바이든 중동정책 향배 주목
하마스의 이번 공습으로 미국이 중동에서 시도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 관계 개선의 노력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존 얼터먼 중동프로그램 책임자는 “(이·사우디) 관계 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모든 노력은 당분간 보류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을 향한 아랍권 전역의 분노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레바논과 요르단, 이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모로코, 튀니지, 튀르키예 등에서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이라크에선 이란 지원을 받는 이슬람 민병대가 미군 기지를 공격하기도 했다. 사우디 일간 아랍뉴스는 “미국에 대한 중동 내 반감이 커져 바이든의 중동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고 전했다.
앞서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전격 철수하며 중동에서 급속히 약화된 미국의 존재감이 요동치는 이 지역 정세에 또 한 번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가시적인 외교 성과가 급한 바이든 대통령에겐 뼈아픈 대목이다.
◆중동이 필요했던 바이든이 놓친 것
미국은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현재까진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리턴매치가 유력하다.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 회장이 주장했듯이 “모든 외교정책은 국내에서 시작한다(foreign policy begins at home).” 2021년 취임한 이래 미국의 자산과 역량을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했던 바이든 대통령이 중동으로 시선을 다시 돌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간 재선에 도전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약점으로는 중동 정책이 꼽혔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20명의 분야별 전문가가 매긴 바이든 행정부의 중간 성적을 지난 1월 발표했는데, 전문가들은 중동문제에 대해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복원 실패 등의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장 낮은 점수인 ‘D'를 줬다. 그리고 3월 중동의 앙숙이었던 시아파 맹주 이란과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가 중국의 중재로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면서 다시 한 번 미국 외교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이든이 중동에서 전임 트럼프와 차별화된 성과를 아직 선보이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2020년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주도로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인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했다. FP는 “바이든이 대선 전에 이스라엘·사우디 관계 정상화를 마무리해 트럼프가 주도한 아브라함 협정의 업적을 능가하려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를 견제해 야심 차게 추진한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핵심 고리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간 수교가 필수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이 국내외로 산적한 정치·경제 문제를 풀기 위해 ‘중동 데당트(완화 국면)’를 적극 이용하려 한다”고 풀이했다.
하지만 지난달 7일 시작된 전쟁으로 중동 외교 치적 쌓기에 힘 써온 바이든 대통령의 허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안일하게 인식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미 인터넷매체 복스의 외교 담당 선임기자 조너선 가이어는 브렛 맥거크 백악관 중동·북아프리카 조정관 등 고위 외교관들이 공개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일이 반복됐다고 꼬집었다. 9월28일엔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한 행사 연설에서 “최근 20년간 이렇게 중동이 조용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며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분석을 내놓았다.
NYT에 따르면 같은 날 미 중앙정보국(CIA)은 정책 당국자와 주요 의원들에게 배포된 보고서를 통해 하마스가 수일 내 이스라엘에 로켓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달 5일에 낸 2차 보고서엔 하마스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이 담겨 있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에 반발해 국경 지역에서 공격에 나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고서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묵살됐다. 그로부터 이틀 뒤 시작된 이·하마스 전쟁으로 중동은 결국 50년 만에 터진 최악의 전쟁 위기를 맞닥트렸다.
◆다극화 시대,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
1973년 상원의원이 된 후 약 50년간 미국의 외교 정책 수립에 관여해 온 바이든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만만치 않은 대내외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이 중동에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 패권)’ 시대의 종말을 알린다고 강조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3개국 정도가 동등한 권력과 지위를 가지는 ‘단극성’이 아닌, 이보다 더 많은 여러 개의 권력이 다중적으로 경쟁하는 ‘다극성’ 시대의 도래가 표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NYT는 “이번 하마스의 공격은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하고 다극화 체제가 본격화한 것을 상징한다”며 “미국은 더는 예전 같은 지배적 강국이 아니고 대체할 국가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정치지도자가 미국보다 자신들의 역내 영향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힘이 전과 같지 않은 데다 새롭게 국제질서를 재편할 국가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각자도생의 시대가 공고해졌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다극성 시대엔 불확실성이 훨씬 크다는 점이다. FP는 “권력 경쟁이 군비 경쟁으로 이어져 핵무기가 확산할 가능성도 다중경쟁 시대의 위험으로 꼽힌다”며 “이란이 이번 전쟁을 계기로 핵 보유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 사우디아라비아, UAE, 튀르키예, 이집트 등이 모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2∼3개의 강국이 경쟁하며 세계의 질서를 이끌 때보다 여러 나라가 경쟁할 때 출혈 비용이 더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또다시 중동에 발목 잡히는 미국
미국은 한껏 쪼그라든 중동에서의 입지에도 이 지역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지난달 26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미국이 또다시 중동에 발목 잡혔다”고 평가했다. 인 교수는 “2000년대 초엔 미국이 중동이라는 바다에 완전히 잠수해 리더십을 행사하려 했다면, 지금은 무릎 정도까지만 담그고 역내 질서 유지를 위해 움직일 것”이라면서도 “그렇지만 미국이 이 바다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다극성 시대에 접어들며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 커지는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핵확산금지조약(NPT)까지 위협받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 교수는 “미국은 질서유지를 통해 자신들의 국익을 확보하는 나란데, NPT까지 무너지면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라며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너도나도 핵 보유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하마스 전쟁까지 터져 상황이 더욱 엄중해졌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 내에서 바이든의 중동 정책을 두고 여론이 갈리고 있어 대선을 앞둔 바이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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