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9월,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생이었던 이승환군은 학교 동호회를 마친 뒤 친구들과 함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을 찾았다. 이곳에서 사소한 시비에 휘말린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에 앞서, 회기동에선 그의 학교 선배들이 싸움에 휘말려 피해자가 병원 치료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었지만 경찰은 피의자들과 이 군이 같은 학교라는 점에서 같은 사건으로 보고 사건을 수사했고 그 결과 별개의 사건은 대규모 청소년 집단폭행 사건이 되어 있었다. 이군은 미성년자였지만 보호자 면회나 변호사의 도움 없이 일주일 넘게 경찰서 유치장에 붙잡혀있었다.
그의 억울함이 풀린 것은 재판과정에서였다. 당시 공판 검사였던 김한수 검사(현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이 군이 회기동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피해자가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도 1시간 뒤라는 점에서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초동수사 과정에서 미흡한 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바로잡고자 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군은 다음 해인 2000년 12월 서울북부지법에서 억울함이 풀렸다.
최근 대통령실 정무수석실 행정관을 끝으로 다가오는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승환 국민의힘 중랑을당협위원장의 이야기다. 이 위원장은 이 사건을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이 위원장은 “이 사건으로 인해 힘 없고 가난한, 또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의 역할에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부처인 수도권, 그 수도권의 중심엔 이 위원장이 자리 잡은 서울 중랑이 있다. 서울 중랑을 지역구는 경기도 구리와 인접해 이번 메가 시티 공약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내리 3번이나 민주당의 박홍근 의원이 당선된 곳으로 이번 수도권 총선의 바로미터로 통한다. 그리고 이 중랑을에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진 이 위원장을 만나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그가 생각하는 중랑을 지역 공약에 대해 들어봤다.
◆내 인생? 똥맛 쓴맛 매운맛이었다
지난달 30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 나선 이 위원장은 “자신의 인생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똥맛, 쓴맛, 매운 맛”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겪었던 유년기는 가난이라는 똥맛을, 청소년기는 억울함이라는 쓴맛을, 그리고 청년기는 주류사회의 한계라는 매운맛을 봤다는게 그가 이처럼 표현한 이유다.
그의 인생사는 여타 정치지망생들과는 다르다. 명문대와 전문직, 그리고 인맥과 학맥으로 얽히고설킨 여의도에서 가난한 환경과 검정고시라는 배경은 차별점으로 통한다. 이 위원장은 “유년 시절, 동네 쌀집에 외상 쌀을 빌리러 다녔고 중학교 때 까지 공동화장실을 쓰던 반지하 방에 살았다”며 “장마로 중랑천이 넘치면 밤잠 설치며 세수하던 대야로 방안에 차오르던 물을 퍼냈고, 겨울에는 연탄가스에 질식될까 봐 창문을 열어두고 자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전혀 상관도 없던 다툼에 휘말려 경찰의 폭력과 강압수사로 누명을 뒤집어쓰며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 마침내 그 억울했던 누명에서 벗어났다”며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견뎌야 할 삶의 무게는 더 가혹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교복을 입어야 할 시기, 건설현장 일용직 막노동과 동대문 원단시장 배달원 등으로 일하며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며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남겨진 빚더미는 스무살의 어린 청년이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무게였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독학사로 행정학 학위를 받았다. 1년의 시간동안 4번의 시험으로 4년제 정규 학사 학위를 딴 것이다. 그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고 필기하던 노트가 땀으로 축축해질 정도로 공부했다며 4년제 학위를 1년만에, 중고로 산 교재비 28만원으로, 그렇게 혼자 대학 공부를 마쳤다.
◆가난해서 억울한 사람들 위해 현실정치로
이 위원장은 “가난해서 서럽고 못 배워서 억울한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비참함이 자녀 세대로 대물림 되는 사회의 부조리는 결국 정치의 문제였다”며 “제도의 문제이자 정치의 문제이기에 개인의 성실함과 유능함만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후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갖고 한양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이 위원장은 “당시 정치학에 재미를 느끼며 국비연구장학생으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정치가 왜 문제인가라고 하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며 “당시 국회 안 정치의 실체를 살펴보기 위해 국회 의원실 인턴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에 하나하나 들어가 이메일을 수집했고 50여명의 국회의원에게 인턴 지원서를 보냈다. 그렇게 그는 현실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위원장은 자신의 국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던 국회 보좌진으로 보낸 10여년의 세월 중 7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정병국 전 의원을 꼽는다.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합리적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행정과 입법을 두루 걸친 정 전 의원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 권력에 줄 서지 않고 자신만의 소신을 지켜내는 게 결국 대중을 위한 마음가짐이었다는걸 배웠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정병국 전 의원은 YS라는 거물을 통한 확실한 정치적 트레이닝,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의 정치라는 든든한 뿌리가 있었기에 권력에 줄 서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며 “정 전 의원의 정치적 행보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럼 나는 얼마나 준비되었나?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 위원장은 국회에서의 10년, 5선 국회의원실 최연소 보좌관과 최연소 보좌진 협의회장을 역임하며 정책 실무는 물론이고 바른정당의 창당과 청년 정치학교의 기획, 그리고 국회의원 공부 모임 등을 운영하며 남들보다 한 차원 높은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또 윤석열 정부의 각종 선거 및 정치적 캠페인 등을 주도하며 정무적 역량 또한 인정받아왔다.
◆국회가 키우고 대통령이 선택한 중랑의 아들
이 위원장은 지역 당협위원장에 응모하며 스스로를 “국회가 키우고 대통령이 선택한 중랑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자신 있게 중랑의 아들이라고 표현할 만큼 그는 단 한번도 서울 중랑구를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중랑구 상봉동에서 태어나 면목동에서 초등학교, 중화동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묵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또 망우동 어머니 백반집에서 함께 배달일을 했고, 지금은 신내동에서 살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모두 치른 곳이다. 심지어 이 위원장의 아내 역시 중랑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연고지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지금까지 중랑을 선거구에서 있던 9번의 총선 중 중랑구 출신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며 “하지만 세대가 많이 변했다”는게 그의 이야기다.
이 위원장은 “과거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영남에서, 호남에서, 충정에서, 강원에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이 들은 서울의 가장 끄트머리인 중랑구에 삶의 터전을 꾸리고 고향을 그리워 했다”며 “하지만 그들의 2세대, 즉 내 또래인 3040세대들은 중랑구가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 역시도 아버지는 전북에서 어머니는 충북에서 올라와 가정을 꾸리고 나를 낳았다”며 “부모님은 중랑구를 선택해 정착한 정착민이지만 나는 선택권 없이 이 곳에서 나고자란 토착민이다. 중랑구는 정치적으로 이 두가지 정서를 모두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하고 나는 이 두가지 정서를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중랑구의 첫번째 정치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몇 년 전 어린 딸 아이와 함께 자신의 과거 집터를 방문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이 위원장의 딸은 “아빠는 몇층 살았어?”라고 묻자 이 위원장은 주차장 바닥을 내려 보며 “아빠는 이 아래 살았어”라고 답했고, 아이는 “아빠 두더지 였어? 왜 지하에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웃으며 울고, 울며 웃었다”며 “나는 중랑구에서 그 가난 했던 추억까지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왜 그리 험지로 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정치를 하기 위해 중랑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중랑구를 위해 정치를 선택했다’고 답한다”고 말했다.
◆정치는 대리운전...이제 중랑구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는 인터뷰 내내 “중랑구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중랑구는 서울의 그 어느 지역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식의 마을 공동체 정책을 중심으로 정책이 입안되었다”며 “중랑구에는 백화점, 예식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백화점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밖인 구리시로 나가야 하고 상견례를 하기 위해서는 바로 위에 동네인 노원구로,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아래 동네인 광진구로 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결국 이곳이 정말 서울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이있다”며 “한 지역의 삶의 질은 주민들이 지역내에서 누릴 수 있는 외식, 문화, 소비 등의 수준으로 평가될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으로 보자면 중랑구는 발전의 방향이 아닌 현상유지를 위한 정체의 길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당이 주장하고 있는 메가시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도 내비쳤다. 이 위원장은 “중랑구민들을 위해 과연 메가시티가 필요하느냐고 봤을때 나는 신중론”이라며 “구리시의 입장에선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신내차량기지에서 첫 열차를 타고 서울 도심으로 출근하는 중랑구민들은 또다른 지옥철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랑구의 재정 자립도는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여전히 20위권 밖인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며 “늘어난 축제와 복지 혜택은 일회성 항목에 그치는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를 대리운전이라고 표면했다. 이 위원장은 “대리운전 기사가 아무리 좋은 차를 몰더라도 그 차는 손님의 차일 뿐”이라며 “내가 앉은 운전석도 차주인 손님의 자리”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잡은 운전대라는 권력 역시 손님이 잠시 내어준 것이다. 대리 기사는 다만 손님이 부여한 운전대라는 권력과 자동차라는 자원을 통해 손님이 원하는 경로로 원하는 장소에 내려드리는 되는 것”이라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차 키를 내어드리면 된다. 나는 고향 중랑구를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과 미래세대를 위해 국민 권력의 대리기사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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