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8000년 와인역사 지닌 와인 발상지/러시아 통치 시절 저가 와인 대량생산 기지로 전락/독립후 조지아 전통양조방식 크베브리 와인으로 옛 영광 되찾아/바지아니·샤토 무크라니·카피스토니 장인 정신으로 최고의 조지아 크베브리 와인 선보여
좁은 골목에 예쁜 카페와 와인바들이 몰려있는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올드타운 잔 샤르데니(Jan Shardeni) 거리. 그 길 끝에서 청동 조각상이 서 있다. 의자에 앉아 소뿔모양 와인잔을 오른손에 든 그는 조지아 전통 만찬 수프라(Supr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상징적인 인물 ‘타마다(Tamada)’. 끊임없는 외세 침략과 8000년 와인 역사. 그래서인지 조지아인들은 오늘도 타마다가 건배를 제의하면 와인을 마실때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해’라는 뜻을 담아 이렇게 외친다. “가우말조스(Gaumarjos)!”
◆8000년 영광을 되찾는 조지아 와인
이 타마다 청동 조각상은 복제품. 조지아국립박물관에 있는 진품의 실제 사이즈는 손바닥보다도 작다. 바니(Vani)시 발굴중 발견된 기원전 7세기 청동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조지아인들은 와인을 즐겼고 타마다가 연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수많은 전쟁을 겪은 조지아의 역사를 대변하듯, 타마다는 항상 가장 처음 ‘평화’를 위해 건배한다.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타마다는 수십차례 건배를 제의하고 참석자들은 그때마다 “가우말조스!”를 크게 외쳐 화답한다. 전통 와인잔이 소뿔모양인 점으로 미뤄 테이블에 잔을 세워 놓을 수 없으니 단숨에 잔을 비어야 한 것으로 보인다. 토스트마스터(Toastmaster)인 타마다는 연회의 분위기를 이끌어야한다. 그러기에 풍부한 지식, 시적인 표현 능력, 유머 감각을 지녀야 뛰어나 타마다로 평가된다. 또 세대간의 갭을 채워주는 역할도 했다.
이처럼 8000년 역사를 지닌 와인 종주국 조지아의 연회에서 와인은 빼놓을 수 없는 술이다. 그럼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와인에 비해 조지아 와인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오랜 러시아의 지배 탓이다. 러시아제국은 1801년 조지아 동쪽 카르틀리-카헤티왕국 강제 병합에 이어 1810년 서쪽 이메레티 왕국까지 수중에 넣었다. 조지아는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1991년 4월에 겨우 독립했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동안 가장 피해를 본 산업이 바로 와인. 조지아는 저렴한 와인을 대량 생산해 러시아에 공급하는 공장으로 전락하면서 8000년 와인 역사는 단숨에 후퇴하고 만다. 일제강렴기 우리나라 전국의 가양주를 금지시켜 전통을 말살하려했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조지아 생산자들은 조상대대로 전해진 크베브리(Qvevri) 양조방식을 잊지 않았다. 여기에 글로벌한 유럽 양조방식도 더하면서 품질을 대폭 끌어 올려 서서히 옛 영광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조지아 대표 와인산지와 품종
2022년 기준 조지아 포도밭은 5만5000ha로 와인 생산량은 25만7000t이다. 와이너리는 2398개로 이중 480개 와이너리가 65개국에 수출하며 75%가 레드 와인이다. 하지만 실제 조지아의 와인의 매력은 화이트 와인이 더 크다. 조지아 전통양조 방식인 땅 속에 묻은 토기 크베브리로 숙성할때 화이트 품종이 더 큰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크베브리는 껍질과 씨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넣은 채 보통 3∼6개월동안 발효와 숙성을 거치는 조지아만의 독특한 와인양조 방식으로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전체 품종은 526종에 달하며 토착 화이트 르가치텔리(Rkatsiteli) 비중이 54%로 토착 레드 사페라비(Saperavi·35%)를 압도한다. 조지아 동쪽 카헤티(Kakheti)가 최대 생산지로 전체 76.7%를 차지한다. 이어 이메레티(Imereti·14.6%), 카르틀리(Kartli·4%), 라차-레츠후미(Racha-Lechkhumi·1.7%) 순이며 아드자라(Adjara), 메스헤티(Meskheti), 구리아(Guria), 사메그렐로(Samegrelo), 아브하지아(Abkhazia)가 나머지 3%를 구성한다.
이 지역의 세부 산지인 원산지보호지정(PDO·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을 받은 곳은 모두 25곳이며 조지아에서 생산되는 전체 와인의 31%가 PDO 와인이다. 카헤티 지역 대표 화이트 품종은 르카치텔리(Rkatsiteli), 무츠바네 카후리(Mtsvane Kakhuri), 히흐비(Khikhvi), 키시(Kisi), 카후리 무츠비바니(Kakhuri Mtsvivani) 등이며 레드 와인은 사페라비(Saperavi)다. 카르틀리 화이트는 치누리(Chinuri), 고룰리 무츠바네(Goruli Mtsvane), 르카치텔리(Rkatsiteli)이며 레드는 타브크베리(Tavkveri), 샤프카피토(Shavkapito)가 유명하다. 서쪽 이메레티의 화이트는 촐리쿠리(Tsolikouri), 치츠카(Tsitska), 크라후나(Krakhuna), 쿤자(Kundza)이며 레드는 오츠카누리 사페레(Otskhanuri Sapere)를 주로 생산한다.
◆사페라비로 피운 ‘백만송이 장미’
바지아니(Vazini)는 조지아 와인 영광을 재현하는 카헤티의 터줏대감이다. 크베브리 와인 품질의 정점을 찍는 톱생산자로 크베브리로 만든 마카쉬 빌리 와인셀라(Makashivili Wine Cellars) 므츠바네 2016이 일본 사쿠라 와인어워드 2018에서 베스트와인으로 선정됐을 정도. 이 대회 심사위원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며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와인을 선정한다. 그만큼 바지아니 와인이 섬세하다는 얘기다.
장엄한 코카서스 산맥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바지아니로 들어서자 수출담당 마이아(Maia)와 타마르 메스히쉬빌리(Tamar Meskhishvili) 자매가 반갑게 맞는다. 와이너리는 1982년에 설립됐지만 역사는 무려 훨씬 오래됐다. 15세기 마카쉬빌리 왕자 가문은 영지에서 생산된 포도로 최고의 크베브리 와인을 만들어 카헤티 지역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마카슈빌리 왕자 가문의 후손들이 설립한 와이너리가 바지아니가 소유한 마카쉬 빌리 와인셀라다. 2012년 와인셀러를 보수하면서 지하에서 120년 된 크베브리가 200여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바지아니는 이중 원형이 잘 보존된 39개로 크베브리 와인을 소량생산한다.
크베브리뿐 아니라 유럽방식 와인도 빼어나게 잘 만들 정도로 다재다능한데 사페라비 품질이 탁월하다. 사페라비는 블랙베리, 블랙체리, 자두, 향신료가 어우러지고 복합미, 높은 탄닌, 산도가 특징인 레드 품종이다. 숙성이 되면 가죽, 담배, 흙내음 풍미가 잘 구현되고 탄닌은 부드럽고 산도는 둥굴둥굴하게 바뀐다. 무쿠자니(Mukuzani) 지역에서는 주로 오크배럴에서 숙성해 드라이하면서 묵직하게 만들고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지역에선 약간 단맛을 낸다.
피로스마니(Pirosmani)는 화이트 르카치텔리 품종으로 만든 세미 드라이 와인으로 잔당은 15g 정도로 높지만 산도가 잘 받쳐줘 밸런스가 아주 뛰어나다. 니코 피로스마니는 조지아 국민 화가의 이름이지만 정부가 ‘피로스마니=세미 드라이’라는 뜻으로 쓰도록 했다. 라트비야 가요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을 구 소비에트연방 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불러 유명해진 ‘백만송이 장미’ 가사 내용이 바로 피로스마니의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심수봉이 불러 유명해졌다. 물감을 직접 만들어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는 조지아를 찾은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에 한눈에 반하고 만다. 무모하게도 전 재산을 팔아 그녀가 묵던 숙소앞을 장미꽃으로 단장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구걸했지만 끝내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했단다.
◆외압속 전통지킨 샤토 무크라니
트빌리시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북쪽 와인산지 카르틀리(Kartli)에선 조지아 와인 역사를 대변하는 샤토 무크라니(Chateau Mukhrani)를 만난다. 진입로를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조지아 사이프러스 나무길 끝에 살구색 외관과 하얀색 창틀로 꾸민 동화 같은 예쁜 성이 등장한다. 1878년부터 와인을 생산한 왕가의 와이너리로 이반 무크란바토니(Ivane Mukhranbatoni) 왕자가 프랑스 보르도와 샹파뉴 지역에서 양조를 공부한 뒤 조지아로 돌아와 조지아 최초의 샤토 개념 와이너리를 열었다.
왕가의 와이너리인만큼 조지아 정·재계와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됐으며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 열린 프랑스 국제 행사에서 금메달을 받으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샤토로 들어서자 휘황찬란한 대리석으로 꾸민 바닥과 조각상, 미술품 등이 왕가 와이너리의 화려함 역사를 전한다. 2층에는 소뿔모양 와인잔, 크베브리 청소도구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돼 있다. 샤토 무크라니는 러시아 지배시절 저가 와인 생산을 강요당하자 아예 와인 생산을 중단해 전통을 지켰다. 샤토 무크라니는 현재 코카서스 산맥 해발고도 520∼605m의 포도밭 102ha를 보유하고 있다.
카르틀리 대표 화이트 품종들을 잘 만든다. 고룰리 무츠바네는 섬세한 열대 과실향과 흰꽃, 라임, 은은한 꿀향이 어우러지면 산도가 잘 받쳐져 활기가 넘친다. 치누리는 아삭거리는 산도가 매력적이며 잘 익은 배, 흰꽃, 민트의 허브향이 도드라진다. 치누리는 치네불리(Chinebuli)로도 불리는데 조지아어로 ‘뛰어난’ ‘최고’ 의미를 지녔다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샤토 무크라니는 직접 생산한 포도만 사용할 정도로 철저하게 품질을 관리하고 2020년부터 모든 와인을 유기농으로 생산한다. 지하 셀러로 들어서자 땅에 묻지 않은 현대적인 크베브리도 눈길을 끈다. 온도와 습도 조절이 가능하면 땅에 묻지 않고도 전통 크베브리와 큰 차이없는 와인을 양조할 수 있단다.
샤토 무크라니는 1976년 설립된 GWS 와이너리도 소유하고 있다. GWS를 대표하는 와인은 조지아의 문화를 잘 표현하는 타마다. 르카치텔리와 므츠바네 카후리를 블렌딩하는 카헤티의 치난달리(Tsinandali) PDO 지역 화이트 와인과 사페라비 대표 산지인 카헤티 지역의 무쿠자니 PDO, 나파레울리 PDO의 드라이 레드와인을 생산한다. 또 라차-레츠후미(Racha-Lechkhumi) 지역 흐반츠카라(Khvanchkara) PDO와 카헤티 지역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PDO의 세미 스위트 레드 와인도 선보이고 있다.
◆희귀 토착 복원으로 전통 살리는 카피스토니
카르틀리의 카피스토니(Kapistoni)는 장인 정신으로 사라져 가는 희귀 토착 품종을 복원해 조지아와인의 전통을 잇는 소규모 가족경영 와이너리다. 크베브리가 보관된 마라니로 들어서자 땅 속에 묻힌 크베브리에서 다양한 토착 품종들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와이너리 오너이자 와인메이커 니코 초치슈빌리(Niko Chochishvili)가 크베브리에 한가운데 작은 뚜껑을 열어 스포일러로 숙성중인 와인을 뽑아 올려 시음잔에 준다. 아직 한달밖에서 숙성되지 않았지만 과일향과 산도가 뛰어나고 제법 밸런스도 갖춰가고 있다. 카피스토니는 이처럼 조지아 와인의 정신과도 같은 크베브리로만 와인을 만든다.
카르틀리의 대표 레드품종인 타브크베리와 샤프카피토는 물론, 부데슈리 사페라비(Budeshuri Saperavi), 아슈레툴리 샤비(Asuretuli Shavi), 다나카룰리(Danakharuli)와 화이트 쿤자(Kundza), 무하무츠바네(Mukhamtsvane)등 이름도 생소한 품종들이 오너이자 와인메이커 니코 초치슈빌리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고 있다. 품종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단일 품종만 사용하며 품종 이름을 레이블에 적는다.
무하무츠바네는 잘 익은 사과, 배, 화이트·옐로 플럼, 오렌지필로 시작해 신선한 호두, 바닐라 오크와 꽃향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고룰리 므츠바네 옐로우 사과 아로마로 시작해 자두, 복숭아, 오렌지 제스트가 피어나고 신선한 호두와 아몬드, 밤꿀이 풍성하게 더해진다. 쿤자는 레몬그라스, 허니서클, 배, 멜론 등 신선한 과일향과 유칼립투스 등 허브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레드 품종 다나카룰리는 겹겹이 쌓인 아로마가 복합미를 선사한다. 블랙베리, 멀베리(오디), 체리, 딸기향이 잘 느껴지고 미디움 탄닌과 구조감을 지녀 마시기 아주 편하다. 샤브카피토는 야생체리, 야생딸기, 황금사과 마르멜로의 과일향과 로즈페탈, 스파이한 붉은 통후추, 제비꽃향이 매력적으로 피어난다. 타브크베리는 야생 블랙베리·블루베리·체리와 검은후추향이 어우러지는 파워풀한 레드 와인으로 우아한 피니시가 긴 여운을 남긴다.
아슈레툴리 샤비는 잘 익은 블랙베리, 야생딸기, 블루베리, 야생체리로 시작해 시간이 지나면 제비꽃과 미묘한 야생장미꽃이 피어난다. 구조감이 뛰어나고 매끈한 탄닌감 덕분에 부드럽게 목젖을 타고 흐른다. 부데슈리 사페라비는 카피스토니 와인 중 가장 바디감이 뛰어난 레드 와인이다. 블랙베리, 블랙체리, 잘 익은 붉은자두에 이어 검은후추, 야생 로즈페탈이 피어나고 다크 초콜릿으로 마무리된다.
꿈에 그리던 독립은 이뤘지만 이처럼 조지아 와인 생산자들은 지금도 사투중이다. 8000년 와인 역사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들의 승리를 기원하며 잔을 든다. 가우말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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