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융마’는 전체 44구 중 14구…“나머지 30구도 녹음 하고, 전체 완창도 도전할 것”
상고 출신으로 직장 다니다 오복녀 명창 만나 서도소리 배우고 전승교육사까지
염원하던 국립국악원 늦깎이 입단 후 요직 거치며 민속악단 예술감독 자리에도 올라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 길 갈 것”
‘서도소리는 내 운명’
최근 서도소리의 정수로 꼽히는 ‘관산융마’와 ‘수심가’ 음반을 발매한 유지숙(61·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명창의 소리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가장 어울릴 말이다.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민요나 잡가를 일컫는다. 남도소리나 경기민요와 다른 음계를 사용하고 음을 떨면서 내는(요성) 가창 등을 해야 해 부르기 어려운 소리로 꼽힌다. 서도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대동강 물을 먹어보고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의 전승교육사로 서도소리 보존과 전승에 온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유 명창은 지난 18일 세계일보와 만나 “이 세상에서 아무도 서도소리를 알아주지 않고 나 혼자 해야 한다고 해도 이(서도소리)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황해도와 가까운 강화도에서 태어난 유 명창은 어려서부터 서도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처럼 황해도 출신이 많았던 데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각각 태평소(호적)와 소리 실력이 뛰어나다보니 집에 마을 어른들이 자주 모여 농악과 서도소리를 즐겼고, 꼬마 지숙은 그 틈에서 춤을 추며 놀았다. 자랄수록 서도소리에 푹 빠졌다. 학창 시절 동급생들이 팝송을 즐겨 들을 때도 이은관(1917∼2014) 명창의 ‘난봉가’와 ‘산염불’ 등 서도민요에만 꽂혔다. “소리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안 돼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작은 회사에 들어갔어요. 4∼5년쯤 지나 회사 근처 ‘민요 단소 교습소’를 보고 무작정 찾아가 ‘서도민요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소개해준 분이 바로 오복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렇게 평양 출신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관산융마·수심가 보유자인 오복녀(1913∼2001) 명창의 애제자가 된 그는 직장도 관두고 서도소리 공부에만 전념했다. 스승의 권유로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국악을 전공하며 내친김에 박사과정까지 밟았다. 그러다 34살이던 1997년, 그토록 염원하던 국립국악원 단원이 됐다. “평생 아무 걱정 없이 노래만 할 수 있겠구나 싶어 국악원 입단을 꿈꿨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겼어요. 국악 예중·예고 출신의 쟁쟁한 실력자가 즐비한 곳인데 저는 상고 출신에 나이도 많았잖아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시험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합격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꿈은 이뤄지더라고요.”(웃음)
이후 국악원 민속악단에 몸담고 수석, 지도단원, 악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예술감독 자리에까지 올랐다. 아울러 평생 서도소리의 원형 보존과 전파에 힘쓴 스승의 바통도 이어받았다.
유 명창이 적지 않은 사재를 털어 제작까지 3년이나 걸린 ‘관산융마’(14구·7절)와 ‘수심가’ 음반을 이번에 낸 것도 그 일환이다. 특히 ‘관산융마’ 전체 44구(22절) 녹음에 나선 건 스승 오복녀와 같은 평양 출신 김정연(1913∼1987) 명창 둘이서 1972년 LP음반으로 녹음한 이후 5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관산융마’는 영조 때 문인 신광수(1713~1775)가 44구로 지은 한시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악양루에 오른 당나라 시인 두보가 관산의 전쟁을 탄식하며 북쪽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를 창으로 부르는 유일한 서도시창이다. 1750년쯤 평양 기생이던 모란에 의해 처음 노래로 불려졌고, 당시 이 노래를 직접 들은 신광수가 “모란이 문득 ‘관산융마’를 노래하면 그 목소리가 지나가는 구름도 멈추게 하는 것 같았다”고 감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 모란이 부른 뒤 당대의 명창과 여러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서도시창을 대표하는 곡으로 전승되고 있다.
‘관산융마’는 고도의 기교를 요구한다. 생전에 “깊어야 싱겁지 않다”며 서도소리의 본질을 강조한 오복녀 명창이 제자들에게 ‘관산융마’를 많이 연마하도록 권고한 것도 서도소리의 다양한 창법을 터득할 수 있는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창법이 고난도인 데다 분량이 많아 대개 공연과 음반에서는 4구 정도만 불린다고. 유 명창은 “서도소리 인생길에 접어들면서 언젠가는 완수해야 할 큰 과업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첫 발을 뗐다”며 “나머지 30구도 음반으로 제작하고, 언젠가 44구 완창 공연도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관산융마’ 44구 완창을 성공할 경우 남북한 통틀어 최초가 된다.
‘수심가’는 서도소리의 섬세한 감정과 호흡을 담은 서도민요의 대표곡이다. 1·2절은 인생무상을, 3·4절은 그리운 고향과 친구를, 5·6·7절은 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8절은 그리운 친구와 외로움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북한에서는 슬프고 근심하는 마음이 가득한 ‘수심가’의 정서를 문제 삼아 ‘인민의 감정을 북돋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며 외면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관산융마·수심가’ 음반은 유 명창의 남편이자 피리 연주 대가 최경만 명인이 반주자로 참여해 의미를 더한다.
유 명창은 “서도소리의 대표 악곡으로 꼽히는 두 곡을 올곧게 음반으로 남겨 우리 소리를 지키고 전승하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번 음반을 제작했다”며 “앞으로도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 길을 갈 것이고 이렇게 좋아하는 음악들 다 남기고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