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KF-21 전투기가 또다시 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초도양산을 둘러싼 사업 타당성 조사를 놓고 지난해 논란을 빚은 끝에 관련 예산이 국회 심의를 간신히 통과한 상황에서 자료 유출 시도가 불거졌다.
2일 방위사업청 등에 따르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근무하던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지난달 17일 KF-21 관련 내부자료가 담긴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유출하려다 적발됐다.
이 사실은 국가정보원과 방위사업청, 국군방첩사령부에 통보됐고 조사가 진행 중이다.
KAI측은 “일반 자료가 다수인 것으로 안다”며 “현재까지 군사기밀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입장이지만, 저장된 자료의 수준과 유출 경위 등에 대한 의문은 증폭되는 모양새다.
국내외 다수의 업체와 기술, 제도 등이 종합된 KF-21에서 발생한 자료 유출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파장은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이는 KF-21의 개발과 성능개량은 물론 수출 과정 등에서도 보이지 않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자료 유출 시도, 왜 심각한가
이번 사건과 관련, 국내외 방위산업계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직후 불거졌던 ‘창원 간첩단’ 사건 직후 경남 지역 방산업체는 보안조치가 크게 강화된 상태였다.
KAI도 예외는 아니다. 경남 사천 소재 KAI 본사와 생산공장 등을 드나드는 인원은 자료 저장이 가능한 모든 전자기기에 대해 검색을 받고 사용승인을 받아야 한다.
주요 시스템에는 저장매체 제어, 접근통제체계 등이 가동되어 외부 유출과 침입을 방지한다. 모바일 단말기 관리 시스템(MDM)을 사용하면서 개인 휴대용 기기 반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KAI 직원이라 해도 모든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KAI 임직원은 사천 소재 본사 등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서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이같은 설정은 5개 이상의 보안등급으로 구분된다. 모든 시설에 접근 가능한 사람은 일부 본부장급 고위 임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10여명이 머물고 있는 인도네시아 기술진들은 출입할 수 있는 곳이 KAI 임직원보다 훨씬 적다. 접근이 매우 제한적인 수준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USB에선 상당한 분량의 자료가 나왔다. KAI 내부에서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정부 소식통은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어떻게 USB를 반입하고 자료를 저장할 수 있었겠나”며 “정보 당국이 조력자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전했다.
USB에 담긴 자료의 종류도 문제다. USB에는 KF-21 시험비행 결과와 항공전자 기술, 해외 원천 기술 등의 자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KF-21 개발 당시 인도네시아는 개발비의 20%인 약 1조6000억원을 부담하는 대신 시제기 1대와 각종 기술 자료를 이전받기로 했다.
이같은 합의에 따라 KAI는 KF-21 설계 단계서부터 인도네시아에 이전 가능한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을 구분했다.
USB를 반출하려다 적발된 해당 기술자 입장에선 인도네시아가 이전받을 기술자료를 수집해서 얻을 이익이 거의 없다. 분담금 미납 문제가 있지만, 납부하면 넘겨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 얻지 못하는 기술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 이전 대상에서 제외된 기술은 해외에서 들여온 것, 해외 원저작권 국가 수출승인(E/L) 문제가 있는 기술 등이다. 이들 기술 중 다수는 인도네시아 기술진의 열람도 통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USB에 자료를 담은 기술자가 KAI에 머물던 인력 중 고참급으로 다른 기술진보다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췄다는 점에서 해당 인물이 우리 측이 이전을 통제하는 기술의 가치를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선 국산 능동전자주사(AESA) 레이더 기술이 포함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AESA 레이더는 개발 주체인 국방과학연구소(ADD)에 핵심 자료가 있다. KF-21 항공전자 장비 중 핵심 기술은 보호가 된 셈이다.
다만 AESA 레이더와 관련 항공전자 시스템의 구분도 등이 USB에 담겼을 가능성은 있다. 전투기 개발 기술이 뒤떨어져 있고, 이슬람국가라 미국에서 기술 반입도 어려운 인도네시아 입장에선 이 정도 자료도 효용성이 있을 수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이번 시도가 처음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6년 KF-21 체계개발이 시작된 이래 인도네시아 기술진이 사천 소재 KAI 본사와 공장에 머물렀다. KAI와 정부, 군 당국이 인지하지 못한 자료 유출이 과거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뢰가 불신으로 바뀔 위험
이번 자료 유출 시도는 KF-21을 둘러싼 국가간, 업체간 관계에 불신의 씨앗을 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특히 KF-21과 관련된 해외 업체와 정부 당국의 움직임과 관련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자신들의 기술이 유출 대상에 포함됐다면, 어떤 형태로든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공식 질의부터 직접적인 조사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도 다양하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국 록히드마틴과 미국 정부다. KF-21 기술지원을 맡은 록히드마틴은 KF-21 설계단계에서 수십가지의 기술을 투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주한 미국 대사관 소속인 주한 미 합동군사업무단(JUSMAG-K)을 비롯해 미국 정부측에서 이미 움직이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미국은 지난 2011년 F-15K 전투기의 센서인 타이거 아이를 한국 측이 무단으로 뜯었다는 의혹이 일자 조사단을 보내 강도높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한·미 관계자들이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번 사건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국 기술이 USB에 담겨있었다면 외교 문제로 번질 위험도 있다. 사건 조사와 후속 처리에 대해 미국 측이 의문을 품을 경우엔 불신이 커질 수 있다.
이는 KF-21에 대레이더 미사일 등 미국산 항공무장을 추가로 체계통합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수출승인이 기존보다 까다로워지거나 승인이 이뤄지지 않을 위험으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
향후 KF-21 수출 과정에서도 이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전투기 제작 과정에서 제3국의 기술과 지분이 포함되어 있을 때, 제3국 정부 승인이 수출에 큰 변수가 된다.
사우디가 2018년 타이푼 전투기 48대 도입 의사를 밝혔으나, 개발 참여국 중 하나인 독일이 사우디 수출에 반대해서 진척을 보지 못했다가 최근 독일이 입장을 선회해 5년만에야 도입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KF-21은 엔진과 링크-16 등 미국 정부 수출 승인이 필요한 장비가 KF-21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문제 없다”고만 할 상황이 아닌 셈이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KF-21은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영국 MBDA), 단거리 공대공미사일(독일 딜 디펜스), 사출좌석(영국 마틴 베이커) 등에서 유럽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강제로 조사를 벌일 권한은 없지만, 거액을 들여 오랜 기간 개발한 제품의 기술이 무단으로 유출됐을 가능성만으로 이들 업체는 불안과 불신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에서 불신의 골도 한층 깊어질 전망이다.
인도네시아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사업 분담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아 약 1조원을 연체 중이다. 반면 프랑스에선 라팔 전투기를 도입하고, 카타르가 쓰던 중고 미라지 2000-5 전투기 구매를 진행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어 KF-21 사업 참여 의지에 대한 한국 내 불신이 적지 않다.
이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자료 유출 시도는 인도네시아와의 공동개발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최소한의 분담금만 납부한 상태에서 공동개발국 지위를 유지한 채 기술만 얻어가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KF-21은 첨단 기술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첨단 무기다. 그만큼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이를 유지하려면 고도의 신뢰관계 유지가 필수다. 이번 유출 시도가 몰고 올 파장이 매우 우려스런 이유다. 철저한 조사와 재발방지대책만이 이같은 파장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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