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마음가짐 못 가져
고독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타인 사랑할 수 있어
마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어도 삶이 버겁다고 느낄 나이다. 그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눈에 들어오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동안 이 악물고 버티느라 고통인 줄도 몰랐던 시간들이 고통이었음을, 이제 이 고통을 내려놓고 힘 빼고 살고 싶어질 때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가 들어올지 모르겠다. 갑자기 쇼펜하우어 바람이 불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쇼펜하우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등 쇼펜하우어에 관한 책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오죽하면 매일 증오의 말, 갈등의 말이 쏟아지는 정치권에서조차 쇼펜하우어의 ‘명랑’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가 나올까.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그래서 쾌활함이 찾아오면 문을 열어 반겨야 한다고.
쾌활함에 관여하는 요소는 돈이 아니라 건강이라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병든 왕보다 건강한 거지가 행복하다! 그럴까? 딴지를 걸고자 치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건강한 거지는 자신을 행복하다고 할까? 그리고 왕은? 건강한 왕조차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고. 물론 그 문장을 이해하려 들면 늘 아파서는 생을 누릴 수 없다는 뜻이겠지만, 사실 늘 건강하기만 하면 우리는 철들지 않는다. 조지훈 시인의 시 중에 ‘병(病)에게’라는 시가 있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병을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라 개성이 강한 친구로 받아들이면 그 친구의 자리가 새롭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아플 때 철이 든다고. 철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건강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들어오면 건강하게 사는 게 아니라 건강염려증을 앓게 된다.
염세주의자로서 늘 우울했을 것 같은 쇼펜하우어는 건강한 삶, 평온한 마음가짐, 그리고 고독을 중시했던 철학자였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의지와 욕망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성의 철학자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믿지 않았다. 그보다는 맹목적인 생의 의지에 주목했다. 생에의 의지는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그 의지는 때때로 중요한 것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악을 넘어서 있는 엄청난 에너지다.
의지와 의지가,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이 세계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최악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 개인은 궁핍하면 고통스럽고, 넘치면 권태에 시달린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고통을 낳고, 채워진 욕망은 권태를 낳는 것이다. 이를 어이하나.
열정이 냉정이 되고, 기대가 실망이 되고, 사랑이 증오가 되고, 믿음이 배신이 되는 세상에서 쇼펜하우어의 해법은 ‘고독’이었다. 상처는 언제나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니 고독을 배워야 한단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다. 홀로 선 사람만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은 사교활동에서 시작한다는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가치를 외부의 평가에 맡겨서는 안 된다며, 명예를 중시하면 평판의 노예가 되고, 맹목적인 욕망에 끌려다니면 평온함을 누릴 수 없다고 못 박는다.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강조했던 철학과는 이율배반적으로 보이지만 그는 욕망을 줄여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욕망은 끝도 없는 것이니 욕망에 끌려다니는 일은 평온함을 잃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인도철학을 사랑했던 흔적이다. 생각해보면 욕망을 정복하지 못하고 평온한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그대, 불혹을 넘겼는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고독할 줄 알아야 한다고. 고독이 힘들어서 이리저리 휘둘리면 자기의 삶을 살 수 없다. 고독할 줄 모르고는 자기를 사랑하기 힘들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주위를 제대로 사랑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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