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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담 만든 판자촌… 배려를 쌓다 [김동환의 김기자와 만납시다]

입력 : 2024-02-24 13:00:00 수정 : 2024-02-24 13: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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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외딴 지역 ‘수정마을’

체비지에 들어선 27가구 주민 60명
10명 중 9명은 60대 이상의 고령층

마을과 맞닿은 도로에 길이 50m 담
주변 이웃에게 판자촌 안 보이게 해
자신들의 삶도 드러내지 않아 좋아
불편한 환경에도 희망의 내일 기대

‘연탄·전열기 사용에 주의해 소중한 인명·재산을 보호합시다.’

지난 13일 서울 양재천 카페거리에서 직선으로 800여m 떨어진 논현로12길 28에 이르니 겨울철 안전을 강조하는 강남구청 주택과의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 체비지(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환수되는 잉여 토지)에 형성된 무허가 판자촌 ‘수정마을’(총면적 2839㎡)이다. 설 연휴 추위를 벗어나 오랜만에 포근한 날씨였지만 이곳은 주변 상가 건물과 빌라 그늘로 뒤덮여 을씨년스러웠고, 그 존재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듯했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논현로의 한 인도에 설치된 담장의 열린 문 사이로 ‘수정마을’의 일부 가구가 보이고 있다.

◆강남의 ‘외딴 마을’… 떠난 이의 ‘고독사’

흘러간 세월과 함께 사는 이도 점점 줄어 최초 100여가구에서 이제 27가구(약 60명)만 남았다. 파출부·건물 경비·재활용품 수거 등으로 생계를 꾸리는 주민 10명 중 9명은 60대 이상 고령층이다.

주민들이 판자촌 삶에 안주한 건 아니다. 구청 이주 정책에 따라 임대아파트로 들어간 사람도 과거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이 일부 삶의 근본까지 바꾸지는 못했다고 한다.

판자촌에서 술을 달고 살던 A씨의 생은 임대아파트에서도 같았다. 변한 건 아파트 주민들이었다. 술 취해 넘어지면 일으켜 주던 이웃은 늘 같은 모습에 차츰 그를 멀리했고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정(情)이 그리웠는지 술 취한 채 수정마을에 이따금 들렀던 A씨는 몇 달 뒤,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망 후 뒤늦게 발견된 ‘고독사’로 알려졌다.

세계일보와 만난 김정열씨는 “술에 취하면 누군가 집에 데려다주고 국이라도 끓여 주리라던 판자촌에서의 믿음이 그곳에선 깨졌을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판자촌 주민의 건강을 챙기는 등 대표 격인 그도 수정마을에 산다.

 

◆담 놓은 삶… 존엄성 위한 수세식 화장실

수정마을과 왕복 2차로 도로가 맞닿은 곳에 놓인 약 50m 길이 담장은 김씨가 고안했다. 판자촌을 숨겨 주변 이웃을 배려한다는 설명이지만, 이곳의 삶을 바깥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김씨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판자촌에 주변 사람들 자존심이 상했을 것 같다”며 “아름다운 풍경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 신경이 쓰였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수정마을 주민의 자존심도 상할 것 같았다”며 “주변에서 이곳을 본다고 생각하면 어찌 창피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덧붙였다. 이웃은 눈에 들어오는 판자촌에 스트레스를 받고, 주민들도 싸늘한 주위 시선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서다.

마을의 재래식 화장실은 2009년에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구청의 수세식 화장실 설치로 삶의 숨통이 트였다. 인간의 존엄성까지 훼손해서 안 됐건만, 가장 기초적인 생리 욕구조차 쾌적한 환경에서 해결할 삶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장되지 않았다.

‘수세식 화장실로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기자에게 물어 ‘위생’이라는 말을 들은 김씨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밝혔다. 재래식 화장실을 드나드는 모습을 이웃이 본다면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겠느냐는 얘기다.

수정마을 담장.

◆‘전기장판>연탄’… 그래도 내일 기다리는 삶

수정마을에서 연탄 때는 집이 일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구마다 여유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주거 환경 탓에 연탄보일러는 꿈도 못 꾸고, 연탄 때는 집도 공동 보관 장소에서 가져다 써야 한다.

연탄을 땔 수 없는 삶은 전기료 폭탄으로 나타난다. 전기장판에 의지하는 삶에서 치솟는 전기료보다 혹한이 더 무섭다. 그마저도 집이 습해 전기장판이 고장 나기 일쑤여서 1년 이상 가는 것도 어렵다고 김씨는 강조했다. 연탄을 모두가 쓸 수 없는 상황과 전기료 폭탄은 ‘빈곤의 사각’이라는 말 외에 더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이들은 산다. 김씨는 “사람 목숨은 생각보다 질기다”고 언급했다. 미래가 없다면 더 바랄 것도 없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오늘의 고통을 감내한다.

거동이 불편한 90대 노인은 낯선 방문객인 기자에게 두유를 내밀며 손님 대접을 하려 했고, ‘괜찮다’며 손사래 친 김씨에게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김씨는 처절한 삶에서 마지막 희망을 놓으려는 사람이 수정마을에 들어와 살고, 자립을 꿈꾸는 이는 이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주거 환경 개선으로 삶이 순환하는 수정마을을 꿈꾼다’던 그의 말 한마디는 ‘일회성 후원’에 몰두하는 대다수 정치인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듯도 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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