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A씨는 지난 2월 아내와 함께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출산만으로도 벅찬 아내에게 곁에서 종일 돌봄이 필요한 갓난아이 육아를 전적으로 맡길 순 없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부서장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남자가 무슨 육아휴직이냐는 것이었다. A씨는 상사의 면박과 트집 잡기를 감내하면서 회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최근 정부가 기업의 대규모 출산 지원금 장려 등으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직장인들은 여전히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마음대로 쓰기 어려운 경우가 적잖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설문조사에선 직장인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일하면서 자녀를 키울 수 없는 현실에 자녀를 포기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직장갑질119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실시한 ‘자녀 계획 및 저출생 문제 해결 정책’ 설문조사 결과를 25일 발표했다.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 설문조사는 지난해 12월 4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이뤄졌다.
해당 설문조사를 보면 청년층인 20·30대 직장인 절반 정도가 자녀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20대 응답자의 47.7%, 30대 응답자의 50.4%다. 두 연령대에서 자녀 계획이 없는 가장 큰 이유로는 경제적 불안정(20대 47.6%, 30대 30.6%)이 꼽혔다. ‘무자녀 생활의 여유’ 때문이라고 답한 이는 20대 11.9%, 30대 9.9%에 그쳤는데, 이는 저출생이 젊은 세대의 가치관 탓이라는 분석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부부 모두 육아휴직 의무화’가 20.1%로 가장 많이 꼽혔다. ‘육아휴직 급여 인상 등 현금성 지원 확대’(18.2%), ‘임신·출산·육아 휴직 사용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사업주 처벌 강화’(16.7%), ‘근로 시간 단축 등 일·육아 병행 제도 확대’(15.2%) 등이 뒤를 이었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 현행법이 강하게 보호하고 있는 제도지만,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실과 법의 괴리가 있었다. 양육과 관련한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응답은 출산휴가의 경우 40.3%, 육아휴직 46.4%, 가족 돌봄 휴가 52.2%에 달했다.

정부 당국의 미온적 감독 관행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실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임신·출산·육아 관련 4대법(출산휴가, 해고금지,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위반 신고 사건 중 기소되거나 과태료가 부과된 비율은 6.8%에 그쳤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내놓은 일부 대기업 노동자만 받을 수 있는 일회성 출산지원금 지급 장려 정책보다는 육아휴직급여를 현실화하고 관련 휴가를 정착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조민지 직장갑질119 출산육아갑질특별위원회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은 이미 필요한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이용하려면 업무평가에서의 불이익, 계약만료 등 갑질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존재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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