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에 은혜 갚은 까치가 있다면 V리그엔 은혜 갚은 야스민이 있다. 여자 프로배구 현대건설의 2010~2011시즌 이후 13년 만의 통합우승이자 2015~2016시즌 이후 8년 만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의 숨은 조력자는 야스민 베다르트(페퍼저축은행)이 있었다.
◆ 현대건설에서 팀을 웃기고 울린 야스민
스토리는 이렇다. 야스민은 2021~2022시즌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 전체 2순위로 현대건설의 유니폼을 입었다. 1m96의 좋은 신장에 압도적인 파워를 자랑하는 야스민은 2021~2022시즌 30경기에 나서 득점 4위(674점), 공격종합 1위(47.30%)에 오르며 최고의 외인으로 군림했다. 양효진을 필두로 한 좋은 국내 선수 전력에 야스민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현대건설은 2021~2022시즌 28승3패로 역대 최고의 승률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여자부가 조기 셧다운되고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않았던 게 한이다.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해 현대건설이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해 경기를 치렀다면 통합우승 기록은 11년 만으로 2년 더 앞당겨질 수 있었다.
야스민의 재계약은 당연했다. 2022~2023시즌에도 현대건설 유니폼을 입었고, 이전 시즌의 강력함은 계속 됐다. 현대건설은 무려 개막 15연승을 달리며 압도적인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야스민은 시즌 초반 13경기를 뛰고 허리 부상으로 코트를 비우게 됐다.
현대건설은 야스민의 허리 치료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스민이 코트에 다시 돌아올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야스민의 자리를 비워놓고, 국내 선수만으로 경기를 치렀다. 전성기 시절 현역 최고의 토종 아포짓 스파이커로 군림했던 황연주의 존재 덕분에 현대건설은 야스민의 공백에도 오랜 기간 선두 질주를 계속 했다. 그러나 결국 야스민은 끝내 코트로 돌아오지 못했고, 야스민의 공백을 국내 선수들이 힘을 짜내 메우다 보니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찾아왔다. 야스민의 대체 선수로 영입한 이보네 몬타뇨(콜롬비아)의 기량도 야스민에 비해선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국 시즌 막판 흥국생명에게 선두 자리를 빼앗기며 2위로 정규리그를 마친 현대건설은 그 상실감이 플레이오프에서도 이어졌다. 3위 도로공사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2전 2패로 시즌을 마쳐야 했다.
◆ 페퍼저축은행 외인으로 돌아온 야스민, 6라운드 흥국생명을 잡다
여기까지만 보면 왜 야스민이 2023~2024시즌 현대건설 통합우승의 숨은 조력자인지 의문이 들 법하다. 흥미로운 스토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현대건설이 물심양면 아끼지 않은 지원 덕에 허리 부상을 말끔히 털어낸 야스민은 2023~2024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신청서를 냈고, 이번에도 전체 2순위로 페퍼저축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돌아온 야스민은 V리그 입성 첫해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위력을 뽐냈다. 팀 전력이 가장 떨어지는 페퍼저축은행에서 뛰었기 때문에 기록에도 다소 손해를 본 측면이 있지만, 페퍼저축은행에서 그래도 믿을만한 공격수는 야스민 하나였다.
페퍼저축은행에서 뛰기 전, 야스민은 V리그에서 코트 위에 뛸때만큼은 승리의 보증 수표였다. 입성 첫해 28승3패, 이듬해 13승을 거뒀으니 무려 41승3패다. 다만 페퍼저축은행에서의 야스민은 그러지 못했다. 제7구단으로 창단 3년째를 맞은 페퍼저축은행은 야스민 외에도 FA 최대어였던 현역 최고의 토종 아웃사이드 히터 박정아도 보수상한선 금액을 꽉꽉 눌러 데려왔지만, 3년째 ‘승점 자판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6라운드 들어 페퍼저축은행은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의 치열한 선두경쟁을 좌지우지했다. 리그 판도를 들었나 놨다했다.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의 선두경쟁이 한창이던 지난달 초. 현대건설은 지난달 6일 도로공사와와의 6라운드 원정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2-3으로 패했다. 승점 1 추가에 그친 현대건설은 승점 74(24승9패)로 흥국생명(승점 73, 26승7패)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실패했다.
이틀 뒤인 8일 흥국생명은 페퍼저축은행을 만났다. 흥국생명의 낙승이 예상됐고, 예상대로 승점 3을 얻으면 선두 탈환이 가능했다. 그러나 야스민은 팀 공격의 43.51%를 책임지면서 무려 53.73%의 공격성공률로 38점을 몰아치며 페퍼저축은행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흥국생명으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완패였다. 사실상 이 경기가 2023~2024시즌 정규리그의 순위싸움을 결정지었다 해도 무방했다. 다음날인 9일 현대건설은 IBK기업은행을 3-0으로 누르면서 흥국생명과의 승점 차를 4로 벌리며 자력우승의 기회를 얻었다.
12일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은 정규리그 마지막 맞대결을 펼쳤다. 승점 6 짜리 매치. 페퍼저축은행전의 충격패에서 벗어난 흥국생명은 현대건설을 3-0으로 완파하며 승점 차를 1로 줄였으나 이미 자력우승의 공은 현대건설에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흥국생명은 15일 열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GS칼텍스를 3-0으로 누르고 승점 79(28승8패)로 시즌을 마쳤다. 잠시 1위를 탈환한 상태.
이튿날인 승점 77(25승10패)이었던 현대건설이 페퍼저축은행을 만났다. 승패에서 밀리는 현대건설로서는 승점 3만 따내면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친정팀을 만난 야스민은 무섭게 현대건설 코트를 폭격했다. 1세트를 페퍼저축은행이 따냈다. 이제 단 한 세트라도 더 내주면 정규리그 1위가 물거품이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현대건설 선수들은 힘을 짜냈고, 2,3,4세트를 내리 잡으면서 승점 80(26승10패)으로 정규리그 1위를 따냈다. 야스민도 34점을 따내며 최선을 다 했지만, 패배였다. 현대건설로선 최상의 결과였다.
◆ 정규리그 1위의 이점, 챔프전 희비를 갈랐다.
현대건설의 정규리그 1위의 이점은 너무나 달콤했다. 승점 1 차이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 흥국생명은 7년 만에 봄 배구 나들이에 나선 정관장을 만나 혈투를 벌였다. 1,2차전을 한 번씩 주고받고 치른 3차전에서 흥국생명은 3-0 셧아웃 승리로 챔프전 진출에 성공했지만, 이틀에 한 경기를 치러야 하는 강행군에 체력적 부담은 심했다.
반면 현대건설은 열흘 이상 푹 쉬며 부상자 회복과 챔프전 대비에 집중했다. 28일부터 이틀 간격으로 펼쳐진 챔프전. 현대건설은 거짓말 같이 세 경기를 모두 풀 세트 접전 끝에 3-2로 따내며 챔프전 우승에도 성공했다.
1차전 1,2세트만 해도 경기 리듬이 돌아오지 않아 완패로 내줬던 현대건설은 3세트부터 집 나갔던 경기 리듬이 되돌아왔고, 흥국생명은 4세트부터 체력 저하가 현저하게 드러났다. 3,4,5세트를 내리 잡으며 리버스 스윕으로 1차전을 잡았다.
2,3차전도 양상은 비슷했다. 3세트까진 모두 흥국생명이 세트 스코어 2-1의 리드를 잡았지만, 4,5세트를 현대건설이 따내며 승리했다. 3차전에선 ‘배구여제’ 김연경마저 4세트부턴 공격한 뒤 다리가 휘청이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그만큼 체력 소모가 심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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