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불명산 자락에 숨은 화암사/계곡길 걷다보면 현호색·얼레지 등 다양한 야생화 반겨/안도현 시인 “잘 늙은 절 한 채” 노래
봄비 내린다. 겨우내 메말랐던 대지 촉촉하게 적시며. 기다렸던 봄비가 무척이나 반가웠나 보다. 작은 빗방울 모여 청아한 물줄기로 흐르는 계곡따라 ‘종달새 아가씨’ 현호색 남보랏빛 고개 쭉 빼 들고 노래 부른다. 이에 질세라, 질투 심한 얼레지도 작지만 예쁜 연보라색 꽃잎 수줍게 드러내며 나 좀 봐달라고 손짓한다.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곳, 잘 늙은 절’ 화암사 가는 길에 야생화 활짝 피었다. 눈감고 깊게 호흡하니 봄의 싱그러운 생명력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른한 몸을 깨운다.
◆야생화 반기는 화암사 가는 길
화암사는 전북 완주군 불명산 자락 시루봉에 숨어있듯 묻혀있다. 아주 작은 사찰이지만 가는 길에 아담한 계곡을 만나고 봄비가 내릴 때면 제법 장쾌한 폭포도 비경을 드러낸다. 계절따라 피고 지는 다양한 야생화도 만날 수 있어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야 할 때 혼자서 타박타박 걸어서 찾기 좋다. 시인 안도현도 화암사의 소박하면서 고즈넉한 풍경에 반했나 보다. 그는 시 ‘화암사, 내 사랑’에서 ‘잘 늙은 절 한 재…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며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고 노래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 꽃나무 군락이 봄비를 맞고 더욱 선명한 색을 드러낸다. 복사꽃인가. 가까이 가서 보니 벚꽃이다. 어찌 이리 색이 짙을까. 평생 만난 벚꽃 중에 가장 예쁜 것 같다. 깊은 산 속이라 늦게 핀 벚꽃에 홀려 한참을 바라보다 화암사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깊은 산 속에 오로지 들리는 것은 장쾌한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뿐. 시끄러운 잡소리 가득한 도심의 영상을 TV로 보다 음소거한 듯하니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제법 많은 봄비가 내린 덕분에 계곡을 흐르는 물이 풍성하고 낙차가 큰 곳에는 작은 폭포가 돼 흐른다. 가장 먼저 반기는 야생화는 화려한 현호색. 신기하게도 작은 새가 고개를 쳐들고 노래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종달새 아가씨’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현호색 꽃말은 보석, 비밀주머니. 오솔길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드문드문 피어있는 꽃은 비밀을 가득 담은 보석같다.
조금 더 산을 오르자 이번에는 얼레지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고개를 숙여 땅을 향해 핀 모습이 꽃말 ‘질투’처럼 자기보다 화려한 현호색을 시기하는 것 같다. 봄날 화암사 가는 길은 얼레지로 유명하다. 주차장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화암사까지 연보라색 꽃이 군락을 이룬다. 백합과 여러해살이 풀 얼레지는 주로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에서 자라지만 척박한 산골짜기에서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잎에는 자주색 무늬가 있고 꽃은 아래를 향해 달리는 점이 특징이다.
◆바위에 핀 신비한 연꽃
야생화가 풍성한 곳이라 그런지 화암사(花巖寺) 이름도 꽃과 관련됐는데 ‘바위에 핀 꽃’이란 뜻이다. 사찰 이름치고는 매우 독특하다.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입구에는 화암사 창건 설화가 자세하게 적혀있는데 눈 속에서 피는 노랑 연꽃, 복수초 얘기가 담겼다. 북쪽 지방에서 눈 사이에 피어난 꽃이라는 뜻으로 얼음새꽃, 눈새기꽃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에서는 눈속에 피어 있는 연꽃이라 ‘설연’이라 부른다.
옛날 불심이 깊은 임금은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전국의 명의를 다 동원해 좋다는 약은 모두 써봤지만 허사였다. 어느 날 겨울 불공을 드리고 온 임금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했다”며 조그마한 연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임금은 연꽃을 찾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고 신하들이 마침내 불명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서 복수초를 찾아냈다. 임금은 연못이 아닌 바위에 핀 연꽃을 하늘이 내린 ‘은혜의 꽃’이라 여겨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겨울에 바위에 핀 연꽃을 기이하게 여긴 신하들이 누가 연꽃을 키우는지 확인하려고 숨어 지켜보는데 산 밑 연못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꽃에 물을 주고 다시 연못으로 돌아갔다.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신하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고 용감한 신하 한 명이 꽃을 꺾어 궁에 돌아왔다. 연꽃을 먹은 공주는 병이 깨끗하게 나았고 임금은 부처의 은덕에 감사하며 절을 지어 화암사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암반 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을 감상하며 절벽과 절벽 사이에 열한 차례 굽어지는 계단을 오르면 ‘꽃비가 흩날리는 누각’이란 예쁜 이름의 우화루(보물 662호)가 여행자를 반긴다. 자연과 한 몸을 이룬 듯, 휘어지며 자란 목재를 그대로 쓴 소박한 자태가 정겹다. 우화루와 남북으로 마주 보는 극락전(국보 제316호)은 단청도 거부한 채 자연이 빚은 운치 있는 바위, 나무들과 어우러지며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극락전 처마를 자세히 올려다보니 여느 사찰과 많이 다르다. 처마를 지탱하기 위해 ‘하앙’이란 부재를 받쳐 놓은 독특한 모습인데 우리나라에선 유일한 양식이다.
극락전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쳤고 현재 극락전은 1605년(선조 3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창비에 원효와 의상이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극락전과 우화루 양옆엔 주거공간 불명당과 수행공간 적묵당이 동서로 마주 보고 있고 극락전 왼쪽에는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을 담은 철영제도 놓였다.
◆봄날 닮은 상큼한 레몬차 마셔볼까
한 시간 정도 화암사를 오르내리니 배가 출출하다. 완주는 싱그러운 로컬푸드로 유명한 곳이라 용진농협에서 직영하는 용진읍 ‘로컬식탁 황금연못’을 찾았다. 완주에서 처음으로 신선한 로컬 식재료만 사용하는 한식뷔페로 문을 연 곳으로 딱 먹을 만한 메뉴만 갖춰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연근을 샐러드, 무침, 전, 조림 등으로 다양하게 선보인다. 연근 샐러드를 입에 넣자 아삭한 식감과 함께 완주의 건강한 흙내음이 입안 가득 밀려온다. 유자소스를 곁들이는 알로에, 버섯탕수, 깔끔한 수육, 도토리묵, 미역, 묵은지에 찰밥까지 1만8000원에 건강한 로컬 푸드를 푸짐하게 맛볼 수 있다.
배불리 먹었지만 디저트도 빼놓을 수 없다. 차로 5분만 가면 요즘 인기 높은 본앤하이리 카페를 만난다. 주인장이 3대째 농사를 지으며 레몬 농장을 함께 운영하는 베이커리 카페여서 직접 구운 다양한 빵과 봄을 닮은 싱그러운 레몬차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용진 읍내로부터 두 번째 마을이란 뜻의 지명 하이리(下二里)와 ‘나고 자랐다’는 뜻의 영어 단어 ‘본(Born)’을 합쳐 카페 이름을 지었는데 진정한 로컬푸드를 선사한다는 의지를 담았단다.
농장 비닐하우스로 들어서자 어른 주먹만 한 샛노란 레몬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 한라봉 등 육지에선 만나기 힘든 만갑 류와 1년에 한 번 정성스레 길러야 당도가 유지되는 만차량 단호박도 재배한다. 방금 점심을 먹었지만 갓 구운 빵에 상큼하고 진한 레몬차를 곁들이면 한 접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시그니처 상품인 단호박 식혜, 떡류, 레모네이드를 비롯해 메뉴를 모두 직접 지은 농산물로만 만든다. 팜하우스, 팜카페, 전통식품 연구소, 브런치 연구소, 이웃 마켓, 팜교육장 등 농업 관련 다양한 공간으로 이뤄졌고 농장 산책은 물론 단호박 파이·레몬청 만들기 등 원데이클래스도 인기다.
완주 여행에서 소양고택과 아원고택 등 운치 있는 고택 23채가 몰려있는 오성한옥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모던한 카페와 한옥이 어우러지는 소양고택으로 들어서니 탐스럽게 핀 붉은 동백이 반긴다. 소양고택은 고창과 무안의 180년 된 고택 3채를 해체한 뒤 이곳으로 옮겨 문화재 장인들의 손을 거쳐 그대로 복원됐다. 갤러리, 두베카페, 플리커책방 등을 갖춰 따뜻한 커피와 차를 즐기며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봄 풍경을 만끽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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