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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시간을 주워 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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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5-08 00:36:12 수정 : 2024-05-08 00: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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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낙 덤벙대는 성격이라 실수가 잦았다. 목적지와 다른 곳으로 가거나 물건을 고장 내는 일도 흔했다. 그러니 먼지를 털다 소파 옆 협탁에 놓여 있던 시계를 떨어뜨리는 일 정도는 크게 놀라울 것도 없었다. 내게 늘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내 탁상시계가 숫자판을 한 장씩 넘겨 시간을 표시하는 플립형이라는 점이었다. 천칭처럼 생긴 외관에 왼쪽에는 시간 단위 숫자판이, 오른쪽에는 분 단위 숫자판이 달려 있었다. 시계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면서 숫자판 수십장을 쏟아냈다. 거실이 순식간에 새까만 숫자판으로 뒤덮였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 나는 숫자판을 줍기 시작했다. 탄성을 지닌 빳빳한 판들이 거실 여기저기로 흩어져 시간을 그러모으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49분, 50분, 52분. 주워 담은 시간들을 다시 시계에 끼우려는데 숫자판 하나가, 그러니까 꼭 1분이 모자랐다. 사라진 시간을 찾기 위해 나는 소파 밑과 협탁 뒤쪽을 샅샅이 뒤졌다. 1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내 손 위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시간들을 더듬어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만지는 일. 이런 식으로 시간을 만져 본 기억이 분명 있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시작되면 탐구생활 첫 장에, 방학숙제 안내문 제일 꼭대기에 들어가 있는 것이 있었다. 생활 계획표 만들기가 그것이었다. 컴퍼스로 그리는 게 성에 차지 않아 나는 꼭 주방에서 곰솥 뚜껑을 가져다 도화지가 꽉 차게 원을 그리곤 했다. 원을 큼지막하게 갈라 제일 먼저 ‘꿈나라’를 써넣었다. 이불을 덮고 누운 사람의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칸이었다. 다른 칸들은 비교적 작고 빼곡했다. 기상 및 씻기, 아침체조, 방학 숙제 하기, 텔레비전 시청. 그런 식으로 24시간을 다 채우고 나면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자를 대고 반듯하게 선을 그을 때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잘라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의 물성을 그런 식으로 상상하고 감각하던 날들도 있었는데. 지금의 내가 시간을 대하는 방식은 대부분 간과다. 벌써 5월이네, 벌써 마흔살이 되었네, 벌써 여름이라니 올해가 절반은 지나가 버렸네. 나는 보통 그런 식으로 시간을 뭉텅뭉텅 잘라 말한다. 무언가 야단스러운 것이 내 삶을 커다랗게 한 입씩 먹어치우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어쩐지 억울한 얼굴을 한 채 지나 버린 시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적당한 핑계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제 와서 뭘 배워, 벌써 마흔살인데. 벌써 5월이 됐으니 올해 세운 계획은 실패네, 내가 늘 이렇지 뭐, 하고 말이다.

마지막 숫자판은 싱크대 아래쪽까지 날아가 있었다. 나는 주워 담은 시간들을 시계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 촘촘하게 뚫린 작은 구멍에 숫자판을 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51분, 52분, 53분 중얼대며 시간을 빠짐없이 채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금 01분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손바닥을 꽉 쥐었다. 숫자판이 아닌 새로운 1분이 이 안에서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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